비밀같은바람2011. 5. 15. 23:12


유쾌한 캐리커쳐를 가득 담은 매우 발랄한 역사서를 표방한 책에서 글쓴이가 처음 꺼내는 말은 '데자뷰'다.  꿈에서 본 듯한 혹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언젠가 보거나 겪었던 듯한 느낌, 기시감을 간혹 만나면서도 나는 역사로까지 확장해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데, 글쓴이는 '무수한 개인사가 압축되어 있는 역사에서도 데자뷰는 종종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생각해 보니 특히나 근현대사를 접할 때 자주 느꼈던 안타까움과 답답함은 반복되는 역사적 데자뷰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승만 시대부터 현재까지, 절대권력과 월북 혹은 밀입북, 전향, 변혁이라는 핵심어로 스무 명의 인물을 다루는 이 책은, 딱딱하지 않은 역사 이야기가 이미 낯설지 않은 중에도 단연 돋보이는 재미있게 읽히는 역사서가 아닐까 한다. 전공자의 막강한 내공을 밑천 삼아 다양한 사료를 열거하며 역사와 인물을 굽어보는 글쓰기는 딴지일보식의 톡톡 튀는 문체로 일관하여 지루함이 없고(간혹 너무 갔네 싶은 느낌이 있기는 하다.), 거의 키워드로만 알고 있던 현대사 인물들을 역사적 상황 맥락과 함께 소개하기 때문에 어렵지도 않다. 총 6장으로 이루어진 목차는 절대권력의 맞수되기 - 이승만의 라이벌, 김구 조봉암 신익희 조병옥 절대권력의 2인자 되기, 한국 현대사의 최강 '넘버 2' 이기붕 김종필 절대권력의 조력자 되기, 해방기 법조인들 김용무 이인 오제도 선우종원 북으로 간 사람들, 박헌영 홍명희 문익환 임수경 '전향'의 세 가지 스펙트럼, 양한모 류근일 김문수 변혁의 불씨들, 김주열 전태일 박종철 그리고 에필로그의 전두환까지로 그다지 일관된 구성은 아니다. 하지만 읽다보면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을 보며 홀로 고민(?)하던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 모냥이 되었을까 하는 몰역사적인 문제의식에 어렴풋이나마 대답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현대사에 대한 면밀한 이해와 인식 없이 그저 빨간 건 좋은 것 나머지는 나쁜 것 하는 식의 이분법으로 사회와 인물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짙은 데다가 역사적 상상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는 지난 시대 혹은 공적인 공간에 놓인 인물을 바라볼 때 그들도 나와 같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걸 자주 잊고는 한다. 특히나 이미 사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활자화되거나 이미지로 결과화된 화석인 채로 역사 속에 놓여 있다는 당위적 무의식으로 인해, 역사와 인물은 분석의 대상이기보다 그저 판단의 대상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원인은 나의 몰지각과 무식이다. 역사라는 공공의 장에 이름을 올린 그들의 삶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역할지어진 것이 아니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에 영향받고 반응하며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 결과라는 걸 이 책은 소상히 보여준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나는 특히나 부정적인 면이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들일 것,이라고 쉽사리 단정하고 다시 눈길 주지 않으며 내 가치에 부합하는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선망만을 마음에 담아왔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들의 태반은 별로 관심하고 싶지 않은 인사들이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앞잡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왜 하나같이 이상할까? 라는 순진한 의구심에 대한 참고자료로는 꽤 훌륭하다. 글쓴이는 공인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 역사서가 보이는 방어적 객관성 대신에 건강한 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 왜곡된 진실 혹은 사료로 확인되는 사실을 과감히 수용하는 것을 자신의 입장으로 삼는다. 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것으로 확신되는 글쓴이는 행간에 묻어놓은 자신의 생각을 주로 반어와 비틀기를 통해 보여주는데, 나름 균형 잡힌 서술을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희극적인 비극으로 점철되었던 현대사와 몇몇 주역들에 대한 눈흘김까지 막아내지는 못한다. 반면교사와 타산지석의 힘을 믿어보고 싶지만 읽다보면 너무나 새삼스레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생각이 좀체 가라앉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의 숫자라고는 1밖에 모르다가 방금 2를 알게 된 아이의 흥분 수준이라는 부끄러움은 있지만, 그마저도 유효하게 나는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의 내용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실은 내가 기억하기 위해 정리하자면),
 

절대권력의 맞수되기에서 다뤘던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 그리고 건국 초기의 정치 상황은 사실 가끔 다른 책으로 접하면서도 뭔가 복잡하기만 하고 맥락이 잡히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승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다보니 당시의 정황이 반복적으로 설명되면서 이해가 한결 쉬웠다. 특히 조봉암과 조병옥은 아는 바도 없이 헷갈리던 인물이었는데 짧게나마 정리된 걸 기억하고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절대권력의 2인자 되기에서는 현대사의 대표 2인자로 이기붕과 김종필을 꼽았다. 이기붕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라진 인물이어서 이름을 들어본 기억도 가물가물 했었는데 글쓴이가 주목한 부분과 별개로 어딘가 연민을 자아내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4.19 정국에서의 일가족 자살이라는 극적인 죽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책에서도 잠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자살은 어떤 상황에서도 미화되거나 인정되어서는 안되지만 이기붕 일가의 집단절멸은 그것이 절대권력에 의탁해 일신의 영달을 꾀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아닌 격변의 시기 자신들에게 돌아올 화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우리 현대사에서는 매우 드문 양심적(?)인 최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을 거진 반세기에 걸쳐 말아먹고도 여전히 건재한 김종필의 어마어마한 이력과 면모는 새삼스런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과거 한일회담의 주역이란 정도나 알고 있었지 5.16의 총감독이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무지로 인해, 내가 알고 있던 제8의 전성기쯤을 구가하던 시절 삼김과 자민련의 JP라는 인식이 얼마나 과분하고도 모자란 인식이었는지를 뒤늦게 절감한다.
 

절대권력의 조력자 되기에서 보았던 해방기 법조인들은 하나같이 모르던 사람들이었지만 시대착오적인 무소불위의 레드콤플렉스가 늠름히 살아있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와 더불어 소위 '타공주의자'라 명명된 반공의 모태신앙을 간직한 자들은 또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역사학을 전공하는 글쓴이가 수많은 사료들을 뒤지고 뒤집고 파헤쳐도 인간이라는 미묘한 종의 속마음까지는 들여다볼 수 없었던 터, 그야말로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듯 빨강에 대해 뼛속까지 적개심을 가진 족속들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과학적 규명은 포기했지만 말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에서는 부끄럽지만 그야말로 남로당과 '임꺽정'이라는 키워드 말고는 아는 게 없었던 박헌영과 홍명희,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에 대해 다루고 있다. 월북한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해방 공간의 혼란함과 건국 초기 북한의 분위기는, 내게는 미지의 역사인 미군정기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상(?)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맥락없는 자투리 독서 말고, 한 번 차분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밀입북으로 묶은 두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의 거사가 남긴 역사적 파장에 더 무게를 둔 서술을 하고 있는데 특히나 임수경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을까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던 터라 좀 미진한 느낌이긴 했지만 적절한 선에서의 정리였다고 생각된다.
 

'전향'의 세 가지 스펙트럼은 상대적으로 더 흥미 있는 장이었는데 전혀 몰랐던, 이름만 알고 싫어했던, 이름과 행적을 보며 통탄했던 세 사람의 전향을 나름대로 전형화한 점이 새롭다. '전향'이 가진 개인적 차원 때문인지 이 장에서는 유독 대상이 되는 인물의 개인사에 대한 서술이 구체적이고 긴 편인데, 읽다보니 그야말로 미워진 양한모와 얄미워진 류근일 그리고 안쓰러워진 김문수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전향이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와 구체적 파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나 생계형 전향자라는 꼬리표를 붙인 김문수에 대한 글을 보면서 느꼈던 착찹함은 한 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뚫린 입이라고 이래저래 욕하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보다 나은(?) 게 있나 하는 반성과 함께.
 

변혁의 불씨들에서는 비교적 잘 알고 있는 김주열과 전태일 그리고 박종철, 일명 열사들이 등장한다. 시간적으로도 현대와 가장 근접한 시점이고 낯익은 내용들인데,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가 김곰치씨의 이소선 어머님께 부치는 편지가 떠올랐다. 아무리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사실도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친숙해지고 당위적으로 인식되며 심지어 별무감해질 때가 있는 것 같다. 해결은 커녕,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문제들은 모습을 달리하여 더욱 집요해져만 가고 있는 현실을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전두환을 거론하는데 어쩌면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은 글쓴이의 지적이 너무나 뼈아프다.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다소 민망한 표어를 내걸었지만 그건 핑계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과거로 묻어버리려던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여론에 불을 지른 것은 결국 돈 문제였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왜 사람들은 살인자란 호소엔 귀를 닫으면서도 돈 몇 푼(?) 꼬불쳐둔 것은 참지 못하는 걸까?' 앞뒤 내용 없이 이 부분만을 발췌하니 조금 거칠어졌지만 글쓴이의 날리고 비트는 글쓰기를 이해하면 오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 이미 그런 시대가 되어버린 걸까. 
 

만화를 비롯하여 그림에는 너무나 까막눈인 관계로 책의 가독성과 완성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캐리커쳐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책으로 처음 접한 글쓴이와 만화 그린이의 책날개 이력을 보고 내가 느낀 (주제 넘지만) 고마움과 든든함은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에게 진부하게 제 2의 한홍구와 박재동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을 겸비한 듯 보이는 새로운 인물들을 발견하는 일은 한낱 독자의 입장에서도 정말 기쁘고 뿌듯한 일이다. 정말 기특하게(?) 잘 만들어진 책이라는 찬사와 함께, 이런 기획이 조금 더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졌으며 현재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까발려줘야만 하는 인사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추천 인물은 본문에도 까메오로 등장했던 정형근, 조갑제, 박근혜 그 외 다수가 되겠다. 비틀기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따스함과 예의를 갖춘 글을 통해, 난도질이 아닌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역사적 인간을 분석하고 독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기억하게 해주는 유쾌한 작업이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선택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쿠폰과 마일리지에도 진심으로 감사. 워낙 모른다 싶어 역사책(?)을 간혹 사기는 하는데 제대로 읽어내는 건 사실 별로 없다. 좀 알아야겠다 싶어 질러놓고도 이런저런 바쁘단 핑계로 진득하게 붙잡고 있기가 쉽지 않고, 기껏 어렵게 읽어봐야 언젠가부터 돌아서면 까먹어버리는 기억이 야속해 아예 책꽂이로 직행시켜버린 게 벌써 몇 권이다. 설 쇠러 집에 가는 차에, 두살바기 조카의 산만함과 엄마의 잔소리를 피할 만한 마땅한 책을 고르다가 집어들었는데 기대 밖의 수확이다. 음력으로 새해를 맞는 첫 독서가 좁은 나를 벗어나 현대사만큼이나 너른 지평으로 확장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켜 준, 고마운 책이다.


2006-01-31 00:49, 알라딘



현대사인물들의재구성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고지훈 (앨피,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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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