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듣고 가벼운 산책에 나섰다. 예전 여행 왔을 때 봉평동에서 지금의 집 쪽으로 걸었던 기억이 있어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무작정 나가보았더니 통하는 길이 있었다. 올해 안에 내려와야지, 하는 마음이었던 5월 여행에서는 이전과 달리 동네와 집들을 기웃거리는 일이 잦았다. 그때 봉평동에서 내려와 무작정 걷다가 마주친 3층짜리 'ㄷㅈ빌라'(좋아하는 선생님의 이름이랑 같다.)를 보며, 저기쯤은 어떨까도 생각했었다. 내 집은 이미 정해졌지만 빌라 이름이 새겨진 그 건물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년 전, 막연히 통영행을 꿈꿀 적의 목적지는 산양읍이었다. 박경리 기념관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 소박한 산양도서관을 만났을 때 참 반가웠고, 부러 들어가 선생님의 책을 찾아보며(한 권 있었다.) 괜히 기뻤다. 또 한참을 걸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풍경이 고즈넉한 당포성지에 닿았을 때 느꼈던 시원함과 평안함도 마음에 들었다. 산양읍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계획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면서는 정말 시골마을인 데다 차도 없는 내게 적당한 곳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통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강구안 뒷골목이다. 사이의 "태평양을 등지고"에 나오는 '호주머니 속 바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은 바다와 마주한 오래된 골목. 차도 쪽은 온통 충무김밥집이지만 뒤편에는 구석구석 백석의 시가 적힌 판넬들이 있어 마음이 일렁였다. 처음 발견한 이후 한 번씩 올 때마다 흐릿해진 기억을 대조하며 시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는 게 의례가 되었다. 트루베르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으며 골목 골목의 시들을 읽다 보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통영에 올 때마다 나름의 인사를 전하려고 먼저 찾아가는 "통영2" 시비와도 멀지 않았다. 언제든 강구안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면 참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충렬사와 서피랑이 있는 -란이라는 처녀가 살기도 했던- 명정동쯤은 어떨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나중의 일.
지금의 집에서는 봉평동이 멀지 않다.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 내성적카페 호심 그리고 아직은 가보지 못한 식당과 카페 들이 많이 있는 곳. 부러 용화사로 이어지는 메인스트리트가 아닌 옆 길로 올라갔더니 새로운 풍경들이었고, 새해 첫날의 봉평동은 한산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지만 내성적카페 호심은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내성적인 나는 차마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봉평오거리로 향하는 길 오른 편의 통영도서관 역시, 공휴일이기도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도 휴관 중인 것 같았다. 집을 정한 후 일상이 안정되면, <토지>를 빌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