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장미]라니, 장미에는 관심 없지만 매력적인 제목이다. 유명한 몇 권의 책 제목만 알고 있을 뿐인 리베카 솔닛을 나는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인가, 멋진 부제가 지금의 내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어차피 오웰도 마찬가지니까. 대체로 반가운 마음으로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뒀는데, 좋아하는 것에 비해 오웰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한참 전이라 적당한 시기에 읽자고 묵혀뒀다. 출간 후 1년이면 궁금했던 것에 비해 오래 묵힌 셈이지만, 그사이 출간된 현암사의 소설 전집에서 [동물농장]과 [1984]를 제외한 네 권을 여름 동안 읽었고 11월 모임 책으로 결정된 뒤 [나는 왜 쓰는가]와 [조지 오웰의 길]까지 읽고 나니, [오웰의 장미] 독서를 위한 최적의 환경이 조성됐다.
책에는 저자 자신과 조지 오웰 그리고 장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가 형식적으로 대략 1:4.5:4.5 정도의 비율로 담겨 있는 것 같다. 일 때문에 런던에 가게 된 저자가 나무를 사랑하는 친구와 ‘오웰이 심은 나무’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오웰이 살았던 월링턴의 집에 찾아갔다가 사라진 나무 대신 그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미를 만나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로부터 오웰의 삶과 글, 장미가 가진 다양한 상징과 관련된 사례들, ‘오웰의 장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일련의 사유 등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개념인 ‘리좀형’ 전개로 펼쳐진다. “1936년 한 남자가 장미를 심었다”라는 문장을 중심으로 아이스 브레이킹처럼 뻗어나가는 이야기들은 가뿐하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과하다 싶게, 그러나 그 본령이 오웰이므로 읽을 만하게 이어진다. 게다가 본문 곳곳에 등장하는 미주 표시, 장미 모양이 귀엽다.
처음에는 솔닛의 필터를 통과한 ‘오웰의 세계’에 대한 재해석, 1936년의 오웰과 장미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2020년대 솔닛의 스펙트럼이 찬란하게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일상과 자연, 효용성 없는 것과 삶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한 오웰의 알려지지 않은 세부를 찾아내고, ‘오웰과 장미’와 연관시킬 수 있는 여러 키워드들을 방사형으로 진전시키며 또 하나의 독립적인 주제로 다룬다. 비가시적이고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근원적인 삶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거대하고 중요한 것들에 가려진 사소하거나 무시되었던 것들의 재발견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현학적이지만 대체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로부터 연원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닿는 곳은, 기존에 익숙한 오웰의 대표 이미지 혹은 상징과도 같은 사회 참여와 변혁, 운동, 혁명 등과 관련된 역사적 내용들이다. 양자를 비교하거나 우위를 따지는 차원이 아니라 그 모두가 삶에 또 세계에 필요한 것이라는, 어쩌면 유려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거쳐 다시 ‘빵과 장미’에 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방식으로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 중에는 티나 모도티와 스페인 내전, 1910년대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시작된 전통적 구호 ‘빵과 장미’의 구체적 원전, 러시아 우생학에 대한 오웰의 관심(그가 죽지 않고 살아 다음 작품을 냈다면 그 역시 오늘날 오웰을 수식하는 한 권의 책 제목이 되지 않았을까?)과 스탈린 시대의 참상, 대영제국의 이중성과 오웰의 가계 탐색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또 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하던 시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 ‘넬리 이모’의 존재 그리고 신혼 시절 “너무나 계속, 그리고 심하게 싸웠기 때문에, 살인이든 별거든 일어난 다음에 모두에게 한꺼번에 알리는 편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신혼 시절 아일린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부분적이지만 오웰의 평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재미있었다. 엄청난 자료 조사와 탐색과 연결 능력으로 미시와 거시를 아우르는 저자의 글쓰기는 감탄스러웠고, 대단한 통찰력과 혜안을 보여주는 지점도 여러 번 만났다. 석탄기와 기후 위기, 장미 공장과 콜롬비아 화훼 산업의 현실 등 의미 있는 내용이었지만 솔직히 약간 편집증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강렬하고 새롭게 다가온 것은 오웰의 질병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사실로써의 그의 일대기를 어느 정도 아는 상태로 작품을 읽으면서도 병의 위중함과 일상에 미쳤을 파장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논리와 의견과 주장이 가득한 에세이들, 유머와 촌철살인이 넘치는 소설들을 읽으며 그의 신체적 취약함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제국 경찰 복무를 반성하며 빈민 생활을 자청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드는 선택과 용기에 대해서도, 이미 그런 삶을 살았기에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글을 읽었던 것 같다. 아직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결핵의 검증되지 않은 신약을 투여하면서까지 살고자 했다는, 내용상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어 [1984]를 직접 타이핑하느라 더욱 위중해졌고 요양을 결정한 후 각혈로 피범벅이 된 채 홀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고 참 무성의한 독자였구나 싶어 무색한 마음이 됐다. 평생을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생각과 글을 일치시키기 위한 삶의 행보에 주저함이 없었던, 마침내 결핵으로 50년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작가의 치열함과 헌신이 새삼스러웠다.
저자의 책은 처음이지만 페미니즘과 관련한 글을 많이 썼고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는 건 들은 바 있다. 오웰의 여러 에세이에 대해 자신의 사유를 덧붙이고 [1984]에 풍부한 재해석과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책 살 때 굿즈로 앞치마가 나왔었는데 [1984]의 세탁부를 주목하는 “꽃과 열매”에서 앞치마가 등장한다. 그래서였나?) 기본적으로 작가에 대한 호감이 없다면 이런 책을 쓸 리도 없었겠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오웰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이 거의 없는 건 약간 의아했다. 당대에 활동하던 여성 작가에 대한 논평이 전혀 없다는 지적이나 “젠더에 관해, 결혼과 가정이 어떻게 권위주의 체제의 축소판이 될 수 있는지, 진실을 탄압하고 강자를 보호하는 거짓을 선포하기에 이르는지에 관한 것”을 오웰의 가장 의미심장한 맹점 중 하나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글의 분량을 생각하면 존재감은 미미하다. 한 세기 전의 인물에 대해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억지가 되겠지만, 인물이든 현상이든 민감하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저자의 시선이 오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아 좀 신기했다.
저자의 책을 처음 읽은 자로서 불손한 말이겠지만 글에서 생동감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번역의 문제는 아닐 것 같고 그냥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인 것 같은데, 자신의 사변과 사유를 자유분방하게 쏟아내도 되는 문화 권력을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체감 상 절반쯤이 ‘직접적으로’ 오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장미나 자신의 이야기와도 뒤섞여 서술되기 때문에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때로는 사고의 깊이와 지적 권위를 가진 연장자가 상대의 주목 여부와 무관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여 문득,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에도 잠겼다. 이 많은 사유와 성찰과 정보와 지식을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책을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엇을 습득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나만 그런지 몰라도 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망각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까지 많은 걸 쏟아 붓듯 채워야 했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내용과 소재와 주제에 우열이나 주종 관계 같은 것 없는, 무엇이 핵심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는 이런 식의 글쓰기가 페미니즘적인 서술 방식인가 싶다가도 ‘우먼스플레인’이란 단어도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 달의 모임 책으로 내가 추천했는데, 너무 방대하고 때로 산만하게 느껴져 버겁기는 했으나 오웰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나름 흥미로웠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장미를 뺐다면 ‘오웰의 장미’일 수 없겠지만, 왠지 저자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인장을 누락시킬 수 없는 캐릭터 같다고 느꼈지만, 또한 남성 작가의 평전 성격의 글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저자의 빛나지만 너무 많았던 말들 대신 그 덕에 새롭게 감지한 오웰의 전기적 단편들을 취하는 것이 더 흡족했다. 아일린 사후에 그토록 결혼하고 싶어 했다는 오웰의 소망은 시대적 한계에 갇힌 남성의 모습일까,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했던 사랑 많은 한 인간의 모습일까. 죽음을 맞은 병실에 남겨진 낚시대를 떠올리면 자신의 회복과 이후의 삶을 믿었던 것 같지만, 마침내 병실에서 결혼한 그의 ‘반려’를 향한 염원의 정체가 나는 궁금해졌다. 어디에서도 정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에 이상하지만 진심으로 덧붙이자면, 책은 좋았다. 그리고 내가 깊이 사유하는 인간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영영 그러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리베카 솔닛•최애리 옮김
2022.11.14.1판1쇄 찍음 11.25.1판1쇄 펴냄,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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