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12. 17. 10:58

 

 

연대를 알 수 없는 어느 미래, 40년 전 지구에서 이주한 정착민들이 일군 심스 뱅코프 콜로니에서는 운영 주체인 컴퍼니의 사업권 상실로 재이주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한 세대 이상 피땀으로 일군 터전에서 쫓겨나는 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고 극저온 캡슐에 실려 장기간 수면 상태로 우주를 이동해야 하는 여정에는 위험이 따른다. 회의의 형태를 빌린 일방적 과정을 거쳐 이주일은 한 달 뒤로 다가오고, 1세대 정착민인 70대의 오필리아는 홀로 남기를 남몰래 결정한다.

 

어린이고 젊은이였던 지구에서 오필리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원하는 만큼 배우지 못했다. 일찍 결혼해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콜로니의 정착민으로 살아온 세월은, 저항할 수 없는 컴퍼니의 지배 속에 죽은 남편과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그리고 며느리의 강압과 간섭이 늘 함께였다. 평생 무엇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던 오필리아는, 맨발과 맨 머리로 정원을 돌보며 자연과 교감하는 고요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버려진 정착지의 단 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셔틀이 순서대로 정착민들을 싣고 출발하는 동안 숲속에 몸을 숨겼던 오필리아는 무사히 홀로 남겨지고, 전에는 상상도 못한 해방감에 젖어 두려움을 털어내며 혼자만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거리에 나서고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정원의 식물들과 마음껏 교감하는 끝없이 자유로운 생활. 이웃들이 살던 집을 뒤지고 콜로니 센터를 살펴 식량을 챙기고, 이주 초기 정착민으로서 배워야 했던 기계 설비 조작법을 떠올리며 나름의 안전을 도모한다.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콜로니의 센터에 남은 것들을 활용해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기계를 가동하고 제어하면서 오필리아는 로그 파일에 접속해 자신의 기억 속 콜로니에서의 생활을 기록하는 일도 시작한다. 누가 볼 리 없지만 무의미하게 잊혀지거나 단순한 정보로 왜곡된 사건을 애써 서술하고 바로잡기도 하며 자신이 경험한 역사를 남긴다.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여러 일들을 시도하며 표현의 욕구에 사로잡혀 광기와 예술 사이 어디쯤일 행위에 몰두하기도 한다. 고독과 자유를 손에 넣은 인간에게 기록과 창작은 숙명과 같은 행태다. 

 

무한히 혼자인 시간을 보내던 오필리아는 우연히 센터 제어실의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소리를 듣는다. 멀리 떨어진 어느 행성에 도착한 새로운 개척민들이 그곳의 미확인 생명체들과 충돌해 모두 죽는 현장 그리고 모니터하는 우주선 인간들의 목소리다. 낯 모르는 누군가들의 떼죽음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동시에 정체 모를 괴동물의 존재를 알게 된 오필리아의 마음은 죽은 이들에 대한 연민,  자신 역시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혼란스럽다. 그리고 유난한 바다폭풍이 불어오던 날, 오필리아는 괴동물 <종족> 일부와 조우한다. 

 

개척민들을 죽인 괴동물들과 오필리아의 만남과 나름의 소통은 의외로 평화롭게 진행된다. 말은 물론 몸짓으로 전하는 의미도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서로에게 상대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확실시되자, 오필리아가 견뎌야 할 것은 뚫어지게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는 괴동물들의 시선 정도다. 시간이 흐르며 상호 관찰이 거듭되면서 오필리아는 괴동물들의 습성과 특징에 대해 조금씩 더 파악하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완전히 거슬리지는 않은 존재가 된다.

 

즈음 지구에서는 새로운 행성을 향하던 개척민들의 죽음과 정체 불명의 생물체에 대한 대응 논의가 진행되고, 생물학자와 언어학자, 인류학자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팀이 군사고문단과 함께 폐콜로니가 된 심스 뱅코프에 당도한다. 셔틀에서 내리기 전 정체 불명의 자생종은 물론 한 인간의 존재도 파악하고 있던 그들을 맞은 것은 오필리아다. 모두가 떠난 폐콜로니에 홀로 남은 70대 여성은 지구인 전문가들에게 자생종 만큼이나 놀랍고 기이한 대상이자, 정상성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로 인식된다.

 

오필리아는 괴동물들과의 공생 과정에서 <종족>의 외교관격인 가수 파란 망토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고 기이한 소리로 소통하지만, 기계와 컴퓨터 등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과학기술의 원리를 꿰뚫는 놀라운 지적 능력을 가졌다. 오필리아가 겪었던 다수의 인간과 달리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과 거리감을 존중할 줄 알며 무엇이든 배우기에 열성적이기도 하다. 오필리아는 원치 않은 인간들 속에서 속으로 삭이기만 했던 자유에의 갈망을 해소하면서도 한없이 혼자여서 때로 잠식됐던 외로움과 무력감을, 괴동물들과 함께하며 비로서 떨칠 수 있었고 편안해졌다.

 

하지만 전문가들에게 괴동물들은 타행성에서 인간을 공격하고 죽인 위협적인 존재로서 연구의 대상이고, 그들과 소통 가능한 유일한 인간인 오필리아는 신뢰할 수 없는 노인 여성으로 여겨진다. 오필리아 역시 그들이 죽인 인간들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맘속 한 편에 자리잡았던 경계심은, 인간들이 그들의 둥지를 파괴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해소된다. 더불어 콜로니에 셔틀이 도착하던 날 태어난 괴동물 아기들과 가까워지고 ‘둥지수호자’로 받아들여진 오필리아에게 이제 괴동물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전문가 집단은 콜로니에 머무는 동안 인류의 갖은 폐단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자신들의 기준에서 무지하고 약하고 이상한 존재를 낮잡아 보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낯선 존재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품고 복속시키려 하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맹신하면서 그외의 많은 것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프로세스에 따르면 괴동물들은 최초의 외계인으로서 자신들이 제안하는 협상에 동의해야 하고, 불법적으로 콜로니에 남은 오필리아는 자신들과 함께 떠나야 한다. 그 계획은 가장 경솔하고 권위적이었던 팀장이 괴동물 아기를 공격하려다 목숨을 잃은 후의 극적이고 전체적인 반전으로 모든 것이 변하지만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의 ‘현재적’ 결론은 오필리아의 선택으로 인해 결국 콜로니가 부활한다는 해피엔딩이다. 전문가 중 나름 상식적이었던 인류학자 오리와 오필리아의 관점에서 어정쩡했던 생물학자 키라는 결혼해 오필리아의 ‘인간 보조’로서 콜로니에 남아 외계인과 함께하는 새로운 문명과 생태계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다. 어느 시공간에서도 쓸모와 지혜를 인정받지 못했던 출산과 양육 경험이 있는 노년 여성들이 새로운 ‘둥지수호자’로 활동하며, 마을은 서서히 사람들로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한때 계획했던 대로 혼자 죽지는 못했지만, 웃음 지으며 죽었다.” 그는 물론 오필리아다. 



12월의 모임 책이었다. 평균치를 밑도는 상상력의 보유자로서 책을 읽을 때 시공간적 배경이 모호하게 인식되면 서사를 따라가기가 난감해지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어디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펼쳐지는 오필리아의 일상이 세세히 묘사되는 소설의 도입부터 흥미가 떨어졌지만, 읽어야 해서 읽다 보니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대략 이주 한 달 전부터 시작되는 오필리아와 콜로니의 상황에 대한 극세 묘사 덕에 이렇게 하루하루의 변화로만 소설이 채워지나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속도감이 붙고 낯선 존재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전되는 내내 오래된 목소리와 새 목소리가 경합하는 오필리아의 내면에 공감이 됐고, <종족>과 조우하기 전 어떤 낌새를 감지한 오필리아의 공포를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며 으스스하게 느낄 만큼 몰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란 망토의 등장과 오필리아와의 언어 교류, 배움 부분의 디테일이 유치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등장할 때마다 흥미가 떨어졌다. 영어와 영어로 표기된 외계어, 그를 다시 한국어로 큰따옴표 안의 대화로 번역하는 일이 무척 어려웠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깨알 같은 디테일 묘사가 많은 데 반해, 정작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던 괴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이해하는 원리 같은 것들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 맥이 빠졌다.

 

주인공 이름을 오필리아로 설정한 것이 [리어왕]에서 비극적 운명의 상징처럼 박제되었던 오필리아를 새롭게 해석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부활시킨 것일까 싶었는데, 그렇다면 간헐적이고 단편적인 언급 속에서도 내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죽은 남편 움베르토의 명명은 무엇에 연유한 걸까 궁금했다. 내가 아는 오필리아가 리어왕의 막내 딸 뿐이듯, 내가 아는 움베르토는 움베르토 에코 뿐이니까. 짧지 않은 분량에 가장 압도적으로 빈번히 등장하는 이름이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는데, 모임을 하면서 누군가 오필리아라는 이름에 대해 말을 꺼내며 이야기가 풍성해졌기에 생각과 발설의 결과론적 차이가 새롭게 느껴졌던 점도 기록해둔다.

 

몇 년 전 김초엽의 몇몇 작품들, 작년이었나 김영하의 [작별 인사], 전통적 분류로써 조지 오웰의 [1984] 정도가 내가 평생 읽은 SF소설의 목록이다. 모임 덕분에 자의 없이 오랜만에 SF소설을 읽었고 가장 강력한 독후감은 역시 나는 SF장르에 매력을 못 느끼는 독자라는 점이었다. 서사의 기반이 되는 과학기술적 배경에 대한 거리감을 차치하더라도, 사건과 인물 등이 창작자의 자유분방한 상상에 기반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SF소설 읽기는 기꺼이 배우고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기르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소설 속 오필리아와 괴동물들이 서로 그러했듯이. 

 

 

엘리자베스 문•강선재 옮김
2021.10.29.첫판1쇄 2031.12.10.3쇄, (주)도서출판 푸른숲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0) 2023.12.26
[너무나 많은 여름이]  (0) 2023.12.24
[오웰의 장미]  (0) 2023.11.18
[조지 오웰의 길]  (0) 2023.11.13
[나는 왜 쓰는가]  (0) 2023.11.12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