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7. 16. 14:39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으로 살아온 나의 마지막 순간이 담긴 서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주인공 철이의 회상기다. 철이는 혼탁한 바깥세상과 유리된 평화로운 휴먼매터스 캠퍼스에서 살아가던 소년이다. 휴먼매터스는 음식과 생분해되는 식기를 튜브에 넣어 쓸어버리는 방식의 설거지처럼,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간단하게 어디론가 보내버릴 수 있”(29쪽)는 공간이다. 때는 21세기의 근미래, 안전하고 편리한 휴먼매터스와 달리 서울과 평양에서는 테러가 빈발한다.

 

아빠인 최진수 박사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이라는 주제로 학위를 받은 연구자이자 휴먼매터스의 창립 멤버, 그는 홈스쿨링으로 이전 세기까지의 문명을 이룩한 인류의 지혜를 아들에게 가르친다. 자신이 만든 로봇 데카르트와 산책길에서 발견한 칸트와 갈릴레오, 세 마리 고양이의 이름처럼 철이라는 이름도 철학에서 따와 지었다. 산책 나간 아빠에게 우산을 전할 겸 나선 저녁 외출에서 철이는 불시에 마주친 이들에게 무등록 휴머노이드로 적발되고, 순식간에 플라잉캡슐에 태워져 바깥세상의 수용소로 보내진다.

 

자신이 인간이 아닐 거라는 의심조차 해본 적 없는 철이는 혼란에 휩싸인 채 수용소에서 만난 선이, 민이와 함께한다. 인간이지만 수용소에 갇혔고, 수용소에 갇혔지만 거래의 수완을 통해 존재감과 안전을 스스로 확보한 선이는 휴머노이드 민이를 동생처럼 아끼며 보호했고, 자신을 최박사의 아들이라 굳게 믿는 철이를 리드하며 미처 몰랐던 세계의 이면들을 깨닫게 해준다. 민병대가 습격한 수용소를 어렵사리 탈출했지만 죽고만 민이의 머리를 챙겨 기억 저장 장치 복구를 시도하는 것도, 그를 위해 만난 휴머노이드 달마에게서 철이의 특별한 제작 목적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선이 덕분이다.

 

선이는 상업적 인간 배아 복제로 생산된 클론 인간이었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았지만 삶을 긍정하는 지혜로운 존재다.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151쪽) 민이의 기억 저장 장치 복구와 관련해 고통과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떠난 생명을 되살리는 것이 정당한지를 묻는 달마와의 논쟁에서 선이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사이 동분서주하던 최진수 박사는 회사의 협조를 얻어 ‘무등록 휴머노이드 단속법’으로 압수된 철이에 대한 반환 소송을 벌인다. 공식 소유주인 휴먼매터스가 원고, 국가가 피고이지만, 실질적인 원고인 최박사가 주도하는 재판이다. 최첨단 휴머노이드 개발의 당사자인 최박사는 그들이 인간 세계에 보급되며 생겨난 다양한 문제들과 딜레마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철이를 만들었다. 휴먼매터스 안에서의 실험은 불안하되 평화로웠지만, 그 밖에서는 고통당한 휴머노이드들이 통제 범위를 넘어 인간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한편 무한한 존재인 그들을 통해 불멸의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어렵사리 최박사와 다시 연결된 철이는 우여곡절 끝에 순수한 의식으로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휴먼매터스를 떠나 싱가포르의 인공지능 업체에 취직한 최박사로 인해 데카르트와 한 몸을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급속도로 발전해 스스로 설계와 생산까지 가능해진 인공지능을 인류의 위협으로 여기기 시작한 최박사와 전 세계의 인공지능을 연결하고 통합해 인간에게 반격을 가할 ‘기계의 시간’을 준비하던 달마의 영향을 받게 된 철이의 평화로운 동거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던 최박사는 이후 바랐던 대로 유한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는다.

 

마지막 장인 “최후의 인간”에서 엔지니어 휴머노이드들로부터 최박사가 설계한 몸으로 거의 회복한 철이는 인공지능 안면 인식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선이를 찾아 나선다. 새롭고도 익숙한 몸으로 먼 길을 떠난 철이는 고양이가 된 민이와 시간이 흐른 만큼 늙고 병든 선이를 재회한다. 선이는 춥고 황량한 남부 시베리아에서 자신처럼 늙고 병든 클론들, 고장 난 로봇들과 휴머노이드들, 여러 동물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고 있다. 그들과 사년간 함께하며 조용한 날들을 보낸 철이는 선이의 임종을 지키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지막을 끝까지 남아 지켜본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고요 속에서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으로 살아온 날들의 회상이 끝나고 철이의 삶 역시 마감된다.

 

작가의 말에서 맥락없이 뚝 따온 "이제 이런 이야기는 다시는 못 쓸 것 같다."는 문장을 홍보 헤드카피로 쓴 건, 내게는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방송에 나온 작가가 첫 번째 독자이자 판단자인 아내의 반응을 전하며 에둘러 보인 자신감에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길래? 하는 기대와 삐딱한 마음이 동시에 들면서 시너지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읽으며 크게 몰입하거나 흡인력을 느끼지 못했고 그다지 새롭지 않았던 것 같다. 배경과 서사에 구사된 상상력 그리고 문체와 사유의 컬러가 조응하지 못하는 느낌도 들었는데,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라기보다 성공한 기성세대 작가의 세계관 전달을 위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측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해라면 미안하지만 말이다. 낯설고 복잡한 배경에 깔린 깊이 있는 문제의식들을 면밀히 이해하고 고민해보려는 의지를 발현하지 못한 게으름도 작용하기는 했는데, 그렇게 에너지를 쓰고 싶을 만큼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김영하
2022.4.15초판인쇄 5.2초판발행, 복복서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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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