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7. 17. 16:26



통영을 다음 거주지로 마음에 담은 후부터 언젠가 읽으리라 생각하며 관련 책을 꾸준히 사모아왔다. 미각이 둔하고 먹거리에 관심이 없어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제목에 '밥상'이 들어간 관계로 스킵한 책이었는데, 7월 통영 여행담 클럽에 저자가 이야기 손님으로 오신다기에 구해 읽었다. 젊은 날 절반쯤의 세계 여행을 하고 짧은 직장 생활도 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많은 곳을 다니며 사진 찍고 글을 쓰던 저자는 12년 전 아내의 일터가 된 통영 생활을 시작했다. 책에는 서울을 벗어나는 즈음부터 통영살이 1년 10개월이 지난 시점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책이 출간된 2013년 봄 운영 중이던 게스트하우스는 이제 '쓰는 마음'이라는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제목 그대로 서울부부가 통영으로 이주해 살면서 남해안 곳곳의 제철 로컬푸드를 경험한 이야기다. 이주하고 맞은 첫 겨울부터 다시 사계절을 보내며 계절마다 만난 먹거리에 대한 내용 그리고 계절 사이에 부부가 추천하는 통영, 진도, 남해, 순천 여행코스가 실려 있다. 첫 겨울에는 거제 대구, 통영 굴, 봄에는 통영 도다리쑥국, 하동 녹차, 진도 홍주, 거제 죽순, 통영 전복, 여름에는 남해 마을, 통영 충무김밥, 통영 갯장어회와 복국, 거제 거봉, 통영 꽃게, 가을에는 구례 쌀, 통영 홍합, 순천 굴비정식, 통영 욕지 고구마, 통영 멸치와 띠뽀리와 솔치, 다음 겨울에는 통영 물메기와 뽈락과 미역. 덕분에 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가장 많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통영에 정착하게 된 계기도 과정도 다르지만 이주를 결정하고 가족들과 식사하며 말씀드렸을 때 눈물을 보인 어머니 이야기나 면허 취득 후 네 번째 운전대를 잡은 날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통영까지 1박 2일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레 내가 겪은 일들을 회상하게 했다.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통영으로 이사했고, 뚜벅이였던 관계로 오후에 서울집 이삿짐을 싣고 급하게 터미널로 이동해 고속버스를 탔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컴컴한 어둠을 마주하며 야반도주자의 심경을 떠올렸고, 자정 가까운 시각 강구안에 도착해 잠시 눈을 붙이려 누운 모텔방 밖에서는 새벽까지 취객의 고성이 들려왔었다. 잠을 설친 이른 아침 살 집으로 이동해 이사업체 노동자들의 무성의와 저열함을 홀로 감당했고, 낯선 시작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느낄 새도 없이 진빠지는 며칠을 보냈었다. 몇 달 후 설날 집에 가서 자수하듯 통영 이주를 말씀드리자 엄마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일주일쯤은 분노와 실망과 눈물이 범벅된 통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미 이사했는데 어쩌겠냐며 즉각적으로 인정한 아빠가 엄마에게 스트레스 주지 말라고 하신 덕에, 격한 후유증은 일주일 정도로 그쳤다.

 

어릴 적부터 북카페며 책방을 마음에 품고 적잖은 이사를 하면서도 수십 년간 축적된 예쁜 쓰레기들을 간직해왔다. 여기서 펼치겠다며 먼 통영까지 싸들고 왔지만, 역병이 창궐하는 세계에 예외는 없었고 뭔가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가 때이다 보니 찾아갈 만한 모임도 거의 없었고 아는 얼굴이라곤 두 분의 아파트 경비 아저씨뿐인 일상이 지속됐고, 일하며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와 무기력이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다. 통영이 아니라 11층으로 이주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집에만 있기도 하고 한 번씩 각성하면 폐인 되겠다 싶어 많이 걷기도 했다. 집 근처의 강의나 교육을 신청해 들으러 가는 일도 잦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급전직하하는 출석률에 위화감을 느낄 때가 많았고 서울과 지방소도시의 차이일까 이곳의 특징일까 의문을 품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날들이 길어지면서 삶의 반경이 축소되고 마음까지 조여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부산에 영화 보러 갈 때면 느끼는 해방감과 행복감은 통영의 열악함을 더 부각시켰고, 집에서 터미널까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버스도착 정보 역시 꽤 큰 스트레스였다. 절대 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운전을 떠올리고 결심했고 부산에 가서 중고경차를 샀고, 연수 마친 지 이제 한 달이 되어간다. 동행인의 지도편달로 롯데마트 한 번 다녀온 것 외에는 집에서 공간까지 왕복 3km가 고작이지만, 느리고 더디더라도 운전 반경은 늘어날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여, 통영 이사하며 네 번째 운전을 했던 저자가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큰 고충의 기록 없이 남해 곳곳을 누비는 상황이 약간 위안이 됐고, 독립영화를 보기 위해 부산행을 고민하는 모습에서는 일방적으로 10년 시차의 동지애를 느꼈다.

 

대체로 재미있었지만 매우 개인적인 이유로 힘든 부분이 있기는 했다. 저자나 책의 문제라기보다 나의 생각과 맞지 않았던 것인데, 생선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 나오는 손질 과정의 구체적인 묘사들이 그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조금씩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고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은 후 마음의 저변에 눌러앉은 어떤 생각들 때문인데, 먹지 않고 살 수 없지만 동물이든 식물이든 인간이 먹는 음식이 생명임은 분명하니 그들을 집요하고 적극적으로 대상화하는 순간이나 장면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물고기도 육고기도 먹는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민망하지만고, 그런 부분이 나올 때마다 무척 불편하고 나중에는 짓눌리는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계절별로 하루씩 읽었다면 덜 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한 호흡으로 읽게 되어 더 그랬던 것도 같다.

 

식도락 문외한인 나는 262쪽의 책 중 채 30쪽이 안 되는 분량에서 집중적인 공감을 느꼈지만, 담백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 때문에 별 관심 없는 내용임에도 글은 술술 읽혔다. 전혀 몰랐던 산물들에 대한 해박한 설명은 새로웠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사적인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었다. 프리랜서 작가로서 많은 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먹어온 저자의 내공이 느껴졌고 먹을 것에 진심인 부부의 바지런함과 도전 정신도 신기했다. 모든 것이 서울과 수도권에 기형적으로 집중된 한국에서 서울에서 나고자란 사람이 서울을 떠나는 일은 결단과 용기를 동반하는 일이고 적잖은 이들이 그런 경험을 책으로 펴내지만, 궁금해서 찾아 읽고 '굳이 책으로?' 싶은 경우도 있었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로 저자의 전문성을 살려 로컬푸드라는 테마를 잡은 걸까 싶기도 했다. 아니면 말고. 

 

출간된 지 십년이 지났지만 지방소도시에서의 삶과 지역의 산물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는 여전히 생생하고 유익한 책인 것 같고, 저자에게는 어쩌면 인생 가장 큰 전환기의 일상을 세세하게 담은 소중한 기록이 아닐까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서 내려온 통영 어딘가에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막연한 반가움과 아전인수 위로의 마음을 느꼈다. 단정하면서도 적당한 웃음을 품은 글이 좋았기 때문에, 나중에 저자가 먹거리 얘기 말고 다른 책을 낸다면 흔쾌히 읽게 될 것 같다.  


정환정
2013.5.31초판1쇄펴낸날,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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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