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를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는데 프롤로그부터 시작해 몇 편의 글로 채워진 1부는 작가가 몇몇 절친들과 어디론가 떠나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우정의 회고담에 가까웠다. 스무 살의 유럽 5개국 배낭여행 중 어떤 날들, 십년지기 작가의 문학상 수상에 함께한 강릉, 방황하던 대학 신입생 때 고등학교 시절 절친과 함께한 뉴욕 생활과 작가가 된 후 행사로 찾게 된 광주에 자리잡은 그 친구와의 이야기 등. 여행은 여행이되 새로운 곳에 당도해 보고 듣고 느낀 점보다는 함께한 이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도드라졌고 시간이 지난 후에 더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은 의미들이 크게 다가왔다. 둘이든 서넛이든 함께하면 어지간히 시끌벅적할 것만 같은 작가와 친구들은 서로 갈구기 바쁘고 자기 말하기 바쁜 만남 아래에 깊은 마음과 배려를 깔아두고, 시간이 지나며 함께하는 시간이 잦아들어도 무르익는 우정을 쌓아가는 느낌이었다.
2부는 2021년 9월부터 석 달 간 제주 남쪽 가파도의 예술인 레지던시에 머무를 때의 이야기. 어디에선가 김연수 작가와의 에피소드를 담은 글을 본 적이 있어 알고는 있었는데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가, 김연수 작가의 책에 이어 이 책을 읽게 되어 그 우연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처음으로 경청해준 ‘어른’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괜히 뭉클해지기도 했고 적잖은 지분으로 등장하는 김연수 작가의 여러 면모를 새롭게 알게 되는 재미도 쏠쏠했다. 작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가끔 마주했던 터라 얼굴까지는 아니지만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과의 사진과 글을 본 기억이 났고, 같은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덕에 읽으며 조금씩 아는 사람이 되는 듯한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3부에서는 언젠가 신간이 나온 후에 함께하는 유튜브를 본 기억이 있는 이금희 아나운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 대다수가 아는 그를 나 역시 알고 있었지만, 글을 읽으며 사람 자체가 주는 감동에 젖어들었고 나 역시 작가처럼 그의 ‘감정의 경제성’과 너그러운 마음씀씀이가 부러워졌다.
작가만큼 많은 여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20대에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고 30대 이후 1년에 한두 번은 짧은 국내 여행을 잊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나의 여행은 9할이 혼자였다. 함께 일하며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같이 갔던 몇 번의 여행이 있었지만, 작가가 풀어놓은 명랑 여행기 같은 에피소드는 기억나지 않는다. 많이 떠들고 많이 마시고 많이 웃고 많이 우는 정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기꺼이 눈썹을 정리해주고 편도 사진을 찍어줄 정도로 허물없는 친구들 조합의 여행. 만약 내가 그런 분위기에 함께였다면 마냥 즐거울 수 있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성향과 세월로 무장한 절친들끼리의 여행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유쾌했다. 결혼과 육아 여부를 막론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는 오랜 친구들, 게다가 무한 긍정과 치밀한 계획과 섬세한 챙김 등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을 두루 나눠가진 멤버 구성이라니.
글을 읽다 보면 작가는 결핍도 불안도 욕망도 열정도 차고 넘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내면에 들끓는 많은 것들을 마음껏 글로 풀어낼 수 있게 되기까지 그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구나 싶어졌다. 실은 겁이 많고 소심하다지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부계유전’과 ‘큰 목소리와 연극적인 성격의 모계유전’을 장전한 채 말로든 글로든 다른 사람을 웃기는 것에 필사적인 작가도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 말이다. 대체로 부담 없이 낄낄거리며 읽다가 유머와 위트 가득한 행간에서 오랫동안 달고 사는 우울증과 불면증이 아무렇지 않게 언급될 때면 그제서야 약간 미안해지고 대단하다 싶어지기도 하는데... 뭔가 고-기복의 삶이 발생시키는 엄청난 낙차를 감당하는 존재의 고뇌와 무게에 새삼 생각이 미치기도 하고, 그럼에도 아무튼 써냄으로써 한때의 즐거운 독서를 선사하는 작가의 노력과 본능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작가가 마침내 쟁취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상이든 여행이든 찐으로 웃음과 눈물콧물까지 나눌 수 있는 이들과의 인연이 그 자체로 휴식이라면 그들에게도 나지막이 땡큐.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이 책 속에 담긴 글들은 내 삶의 각별한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또 나와 나를 둘러싼 친구들과의 순간들을 정리하기 위해 쓰였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썼다. 솔직히는 읽으며 간혹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역시 어떤 반열에 오르면 그 존재감과 위상으로 무엇이든 쓸 수 있게 되는 것이군’ 싶기도 했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한편 그의 친구들과의 여행이 40대에도 50대에도 계속 이어져 기록으로 엿볼 수 있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들썩하고 질펀한 시간을 즐기는 부류는 아니지만 나이를 먹으며 함께 나눌 추억을 꾸준히 쌓아온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다 보니, 대리만족이라도 즐거울 것 같다. 순도 무한대의 휴식을 일상으로 보내면서도 참 책 안 읽은 한 해였는데, 확인해 보니 올해 첫 책이 [믿음에 대하여]였더라. 작가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한 해의 첫 책과 마지막 책으로 삼을 만큼의 열혈은 아니므로, 남은 올해 동안 한두 권의 책은 더 읽어야겠다. 무채색의 마음으로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다가도 책 한 권 펼쳐들면 잠시나마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기웃거릴 수 있으니 다행이다.
박상영
2023.6.30초판1쇄, (주)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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