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사람을 들여다보는 책을 연속해서 읽게 됐다. 책장을 덮고나서 생각해보니, 한 해를 마감하고 시작하면서 언제나 사는 일이 요령부득인 '나'를 돌아보려는 무의식이 작용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십 년쯤 전에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좋은 느낌으로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다른 책에는 손이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자기고백적인 이 글을 읽으며 마치 내 속의 말인 양 깜짝 놀라는 경우가 너무 잦아서 이렇게나 동류(?)인 그녀에 대한 오랜 외면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그녀의 별로 매력적이지 않음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참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사실이다. 비쥬얼의 현혹에 매인 굳건한 무의식과 자의식은 분명 저자가 풍기는 분위기에 따른 독서 편력을 지속시킨 한 축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몸앓이로부터 시작된 저자의 자기 탐색은 전문적인 정신분석의 과정을 통해 무의식 속에 자리한 유년 시절의 상처를 직면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행간의 어림으로 짐작하기에 그녀는 삼십년 이상을 착하고 선하되 능력 있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으로 자신을 길들이며 지쳐왔던 것 같다. 마음을 말뚝에 매어두고 싶을만큼 휘둘리며 살아가면서도 내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단속하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마음 안에 오래 갇힌 자아가 결국 몸을 괴롭혔을까. 그녀는 정말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지난한 정신분석을 통해, 마음 읽기에 어느 정도 눈이 트인 저자는 수 차례에 걸친 여행의 기록과 더불어 심리/여행 에세이라는 조금은 독특한 책을 만들어냈다.
언제나 '삶이 안정되면,,,' 이라고 되뇌이며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그녀의 여행 후일담은 온통 사람의 마음을 향한 시선으로 점철되어 있다. 혼돈과 방황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하고 주의 깊게 타인의 내면을 관찰하며 인간 일반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끊임없이 내면의 문제를 고민하며 접해 온 여러 자료들과 정신분석을 통한 본인의 경험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그녀는 정신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선배의 입장에서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나 놀랐다. '마음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분명 그런 사람들이 있다. 고작 서른을 넘기면서도 '제발...' 했었지만, 이제는 나도 조금 알 것 같다. 그 마음 때문에,라는 건 평생을 지고 갈 자기 몫이라는 걸. 마음을 말뚝에 매어놓고 싶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로시의 환상적인 여행보다도 양철사냥꾼의 마음없음을 한없이 부러워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에 매여있는 내 모습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저 조금 무던하거나 조금 예민하거나, 아니면 조금 더 바쁘거나 조금 더 무료하거나의 차이일 뿐 누구나 스스로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덮쳐버린 생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꺼내드는 비장의 카드 역시 마음의 문제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좀더 마음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편인 나는 저자의 이야기가 반쯤은 미더워지기 시작했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을 자신의 삶과 결부시켜 오랫동안 깊숙히 탐독하고 받아들여왔던 저자는 비전문가라는 자유로운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무의식, 사랑, 대상 선택, 분노, 우울, 불안, 공포 등 무려 스물 일곱 가지에 이르는 마음 상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분석의 기술은 전문가에게 있으되, 분석의 대상인 마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까닭에 독자 역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정신분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저자의 경험적 확신 탓인지, 학계에서 이미 명확하게 규정된 개념에 대한 존중을 위해서인지, 문외한인 내 입장에서 느끼기에 이건 좀 비약이 아닐까 싶게 힘이 들어간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목차의 사슬에 묶여, '심리'에세이라는 타이틀에 묶여, 조금은 불필요한 내용까지 의무적으로 기술하다보니 자연스런 글의 흐름이 끊기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는 점 역시 다소 아쉬운 점이다.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마음 상태에 굳이 우열과 호오의 적나라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은, 무지하게 고통스러운 양 하면서도 여전히 한편 마음놀이를 즐기고 있는 자가 느끼는 양가감정이겠지만, 때로 바닥까지 까발리고 냉정을 요구하는 듯한 태도는 편하지가 않았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승복하고 싶지는 않은 이상한 오기가 발동되는 순간이, 저자의 이야기대로 라면 실은 나의 무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내 속의 힘 세고 오래된 허무주의가 작용한 결과...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렇게나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주고 부정적인 감정의 단초들과 직면하려 애쓰는 걸까 싶은 생각 역시 스멀스멀.
실은, 집필의도에는 다소 비껴간 감상이겠지만 세상 수많은 곳을 다녀본 저자의 유람이 나는 더 부러웠다. 버거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보루로서의 여행이라는 측면이 크기는 하지만, 행간에 배어있는 그녀의 삶의 고통이 전혀 과장되지 않은 것이라는 믿음 정도는 놓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러운 것은 부러운 것. 벌써 6년 전이 되어버린 나의 여행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묵었던 로마의 민박집, 가져간 담배를 함께 피우며 유학생 주인 언니와 나눴던 얘기 중에 김형경씨가 있었다는 것도 새삼 기억이 났다. 꽤 오래 그 집에 묵으며 지냈었는데 돌아간 뒤에 무언가를 한 가득 선물로 보내왔었다고. 달랑 한 편이지만 '새들은...'을 읽었던 터라 내가 관심을 보이자 뭐라뭐라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글 속에서는 그 유학생 언니가 등장했다. 집주인과 손님으로 잠시 만났을 따름이니 인연이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니 겨우 이틀을 지내면서도 밤이면 식탁에 마주 앉아 꽤 많은 속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익명의 이방인이라는 자유로움도 물론 작용했겠지만, 돌이켜보니 그 언니 역시 갇힌 마음, 혼란한 마음 때문에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마다 침대맡 스탠드를 켜놓고 일주일 정도를 띄엄띄엄 읽었는데, 그저 휘둘리고 흔들릴 뿐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탓인지... 흡입과 거부의 욕망이 수시로 번갈아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낮에는 내내 머리 속에서 책 속의 이야기들이 떠올랐고 조금씩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마음을 인위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곧 자연스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느끼는 부류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뭔가 진정하지 않다고, 뭔가 건설의 냄새가 난다고 손사래를 쳐왔던 내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왔던 '사람은 안 변한다'는 믿음은, 단지 그러고 싶은 내가 만들어왔던 거였나. 워낙에 초심자인 탓이 크겠지만, 거의 내 모든 것인 마음에 대해 적잖은 화두를 던져준 책이다.
2006-01-06 21:50, 알라딘
|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미있고 친절한 길잡이 역사책 (0) | 2011.05.15 |
---|---|
삶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0) | 2011.05.15 |
황당한 든든함, 지하실의 2인조 (0) | 2011.05.15 |
골 때리는 "의학박사ㆍ이라부" (0) | 2011.05.15 |
그냥, 그런 게 있었단다. (0) | 2011.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