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3:03


'공중그네'는 이상하게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비쥬얼의 현혹에 꽤나 매인 눈을 가지고 있는 나는, 활자로 표현된 이미지에도 무척 혹하는 편인데... 사실 내가 아니라도 닥터 이라부는 거의 괴물에 가까운 그로테스크한 외양을 자랑하는 인물인 고로, 엽기적인 행각을 일삼는 그의 좌충우돌 치료기가 썩 내키지는 않았다. 무지하게 웃기다는데, 읽을 때의 내 마음 탓인지 저자가 내미는 에피소드에의 공감만큼, 어이없는 이라부의 언행에 유쾌한 웃음이 따라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하는 마음으로. 촌스러운 연두색 바탕에 [화제의 베스트셀러 <공중그네> 제2탄! 못 말리는 웃음 폭탄 '이라부'의 엽기 처방은 계속된다!] 라는 노골적인 카피를 떡하니 드러낸 책표지를 보며, 솔직히 말하면 거의 절망적인 마음이 일기도 했으나... 얇고 날렵하니 부담은 없겠다 싶어 내친 김에 '인 더 풀'까지 하는 생각이었다.
 

전편에 이어 여기서도 다섯 명의 내담자 등장, 한층 업그레이드된 그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온 세상 남자들의 스토킹에 시달리는 과대망상 도우미, 체면 치레 및 이미지 관리의 강박으로 마음길 막고 살아가는 아비를 대신해 잔뜩 화내고 있는 자식 덕에 곤경에 처한 소심한 이혼남,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몸의 이상 징후를 병적인 수영에의 의존으로 해결하려는 회사원, 또래 속에서 자신의 위상 높이기만을 유일한 존재가치로 삼는 휴대폰 중독 고등학생,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과도한 불안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며 좌불안석하는 논픽션 작가. 그리고 전편에서는 짙은 혐의 정도로 넘어갔던 이라부와 마유미의 증상(?)도 한 가지씩을 덧붙이자면, 일명 주사 페티시즘과 혹시 노출증.
 

각 단편의 이야기는 (다소간 마음이 풀린 탓인지) 재미있었고, 특히나 누군가와 소통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진심이 닿지 않는 허약한 연대에 휘둘리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인간 관계 속에서 튀어야 한다거나 같아야 한다거나 혹은 끼어야만 한다는 믿음은, 파편화된 관계 속에서 혼자서는 도저히 안도할 수 없는 인간의 약함이 부여잡는 미덥지 못한 동아줄일 뿐이다. 하지만 너무나 극단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조금이라도 불편한 함께의 상황에는 지레 기겁을 하고 차라리 혼자임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내 모습도 실은 그들과 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실은 그보다...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으로 빚어지는 일상사 속의 스스로를 생각하니, 자의적인 기준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바람직하거나 멀쩡하고자 하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내 마음 속에는 늘 은연 중, 일관되지도 않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기준이 떡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 조금 딱딱하다면 뭐랄까, 내 기준에서 최소한 멀쩡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책 속에서 단 한 번 직접 언급된 주사 페티시즘과 노출증,이라는 말이 머리 속에 한참을 맴돌았다. 통쾌하기도 했고 시원하기도 했다. 나는 역시 스스로 어떠해야만 한다는 관념에 매여 무척이나 부자유스러웠던 걸까. 대체로 멀쩡한 척 하려는 게 오히려 더 문제였던 걸까. 모두 어딘가 조금씩은 고장난 채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돌보고 때로는 치료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나로 향하면 언제나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책 말미에 붙은 옮긴 이의 말은 사뭇 우주적이고 자못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두 권의 책을 통해 이미 그들이 하염없이 초현실적인 인간임은 알고 있었건만, 이라부와 마유미에 대한 그리고 이라부 신경과라는 배경에 대한 너무나 도식적이고 진지한 설명은 분명 아연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며... 소위 사회인에게 요구되는 그 어떤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방식을 고수하는 지하실의 2인조에게 이미 살짝 호감을 느껴버린 관계로, '깊이에의 강요'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은 옮긴 이의 사족이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이미 꽤 멋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타자의 시선이나 종용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옭아매는 이러저러한 당위의 명제들이 떠올랐다. 책장을 덮은 후에는 진한 공감으로 밑줄을 그었던,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대한 마유미의 대답이 머리 속을 맴돈다. "친구 없는 놈, 떼거리로 노는 거, 나, 안 좋아하거든." 가끔 중얼거리고 싶은 마음에 드는 말이다.


2006-01-01 06:52,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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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