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3:01


무척 지난한 일상이라며 자탄에 빠져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리뷰를 보고 주문 했었다. "인더풀"과 함께 날아온 책은 일단 가격대비 권수에서 만족, 당장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바쁘기도 했거니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지만 일제--;;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리감도 작용. 또한 관심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마루야마 겐지 외에는 기억에 남는 작가도 없고, 고유명사에 대한 단순기억력은 꽤 훌륭하다고 자평하는 편임에도 이상하게 일본 이름에는 약한 편이라 의식적으로 저어하기도 했다. 한 편 대책없이 분방하게 뻗어만가는 얕은 관심과, 정비례하여 얄팍해지는 밀도에 대한 알량한 단속이기도. 그러나 오랜만에 마음 먹고 책을 읽어보자 하고 시작한 독서가 뭔가 지지부진하게 마음 언저리에만 떠돌고 마는 것 같아 일종의 테스트 겸 집어들었다. 어제 읽은 자비에르식으로 말하자면, '내 안의 동물성이라는 타자가 영혼이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책읽기를 혼자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동중독자의 피를 타고난 내가 연달아 냉정한 별 세 개의 리뷰를 올릴 턱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게나 재미있다는 이 책마저 별무감동이라면, 그건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 인정하고 대책을 강구해보려는 심사였다고나 할까.
 

실제로 가봤다는 사람 별로 많지 않고 나 역시 아무리 영혼이 소란해도 가 볼 생각은 차마 안하는데도 불구하고(정신과라서가 아니라 워낙 병원행을 기피하는 관계로), 정신과가 언제부턴가 꽤나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정신과 의사들의 활발한 저작활동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흔히들 하는 말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두가지 쯤의 정신병리적 징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사이코 드라마니 하는 매스컴의 영향으로 현실의 양극단이 공존하는 매우 모순적인 공간이라는 인식, 혹은 거리감도 없지는 않은 것 같지만, 철 없는 편견 속에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불리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게 이제 정신과는 은연 중 친숙한 장소가 되어버린 것 같다.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구성이 조금 독특하다. 다섯 편의 에피소드에 각각의 독립된 주인공이 등장하고 의학박사 이라부는 붙박이 감초처럼 지하 상담실과 내담자의 공간을 넘나들며, 각 단편 주인공들과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작 형식이다. 1인용 소파에 짧고 굵은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이라부 박사와 깊이 파인 가슴과 짧은 미니스커트 가운을 입은 나른한 간호사 마유미,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하기도 한 2인조 치료팀은 고민거리를 가지고 온 환자에게 자기 관심의 피력과 대책없이 엉뚱한 해결책 제안 그리고 비타민 주사 한 방과 당황스런 무관심이라는 독특한 처방과 진료로 일관한다. 각자 자신이 처한 치명적인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진료실을 찾은 내담자들은, 마음 깊은 곳의 욕망 혹은 내심의 소리에 대해 스스로 마음과 귀를 열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라는 시스템의 일원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스스로를 보살필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라부 박사의 진료는 상담이나 치료와는 거리가 먼, 의사의 말이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철없음과 솔직함의 극치를 보여줌으로써 내담자가 반면교사를 얻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억압을 해제하고,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나아가 실천하는 것까지. 하여 이라부는 여류작가를 만나면 글을 쓰고, 야구선수를 만나면 캐치볼을 하고, 심지어 서커스단원을 만나 공중그네 묘기까지 선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실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을 너무 어렵고 복잡한 문제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는 생각했다. 포커페이스가 없이는 성공은 커녕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이 확고한 세상, 하지만 그런 세상의 흐름을 탓하는 사이 이미 너무 뒤쳐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의 엄습, 마음 열 만한 친구 하나 없고 많은 것을 비밀리에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들, 그러나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이미 자정능력이니 하는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현실. 대체로 문제는 욕심에서 비롯되지만, 하염없이 솔직하고 담백하다고 해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도 물론 아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재미는 있었으나, 아무래도 너무나 긍정적이고 천진난만한 이라부 박사의 진료는 내 코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흔쾌히 마음열기가 잘 되지 않고, 그리고 약간은 천성적으로... 음.


2005-12-24 12:43, 알라딘



공중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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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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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