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당 합창석 첫 경험, 지난해 통영국제음악제 폐막 공연 때는 대전시립합창단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자리했던 곳에 앉게 되었다. 일찌감치 매진되었다가 티켓 추가 오픈 문자를 받고 잠시 고민하다 예매했는데, 지휘자(마르쿠스 슈텐츠였다, 서울시향의 지휘자이기도 하다고)를 정면으로 보며 유려한 움직임은 물론 표정까지 살필 수 있는 건 흥미로웠지만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파트 밖에 보이지 않아서 관악기와 타악기는 소리만 들어야 하는 게 아쉬웠다. 어차피 클래식은 잘 모르니까 오케스트라 공연의 경우 시각과 청각을 함께 가동하면서, 소리와 연주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재미있고 흥미로웠는데 그게 안 되니까 확실히 감흥은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아시아 초연이라는 첫 곡 “풀려나다”는, 나의 약소한 경험에 의거한 현대 클래식 음악답게 멜로디보다는 리듬과 불/협화음의 화성, 현악기들의 연주 파트가 전체적으로 두드러졌고 간혹 관악기와 타악기의 임팩트가 강조되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한 번 들어서는 기억할 수 없고 주요한 멜로디라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아 인상적으로 남은 부분은 없었지만,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 있던 작곡가 앤드루 노먼이 소개되고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모습만은 인상적이었다. 내가 문외한일 뿐 '클래식 현대 음악계'(이 말 맞나?)에서도 새로운 작품은 계속 발표될 테고 수많은 악기들을 고려해 작곡과 편곡을 하는 작업은 엄청난 노력과 재능을 요구하는 걸 테니, 작곡가에게는 무척 기쁜 자리였을 것 같아 잠시지만 진심의 축하를 보탰다.
모르는 분야지만 대중 음악과 비대중 음악의 격차는 매우 클 것 같고, 현재의 기악곡들에도 그냥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장르 명명이 맞는 것인지 나만 모르는 것인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내게 공식화된 '클래식=고전'이라는 의미가 맞는 건가 싶어 'classic' 단어를 찾아보니 '1. 고전의 2. 클래식 3. 전형적인 4. 전통적인 5. 대표적인' 등의 뜻이 나오는데 보통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이런 식으로 배웠지만 클래식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악기 구성과 형식 등을 이용한 동시대의 음악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는지 궁금해졌다. 얼핏 modern이나 contemporary 같은 단어를 쓰나 싶지만 그 역시 시대 구분이지 음악의 장르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할 것 같으니 말이다. 금세 잊을 궁금증이긴 하지만, 내년이든 그 전이든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을 보게 된다면 다시 떠오를 것 같기는 해서 정리 안 된 와중에 적어둔다.
다음은 바로 전날 저녁에 변경 공지를 받은 소프라노 박혜상의 협연이었다. 애초 폐막 공연의 협연자는 폴란드 피아니스트 데죄 란키였는데, 예매하면서 찾아보며 알게된 바 기존 내한 경험이 있는 노장이었다. 클래식 문외한에게 폴란드는 쇼팽의 나라이고 피아노는 편안한 악기이므로 마음에 들었는데, 일주일 전쯤 협연자가 러시아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로 바뀌었다는 문자를 받았었다. 한국의 코로나 상황을 우려해 데죄 란키가 내한을 취소했다는데, 통영국제음악당 기둥에 크게 포스팅된 그의 얼굴을 익혀버린 관계로 언젠가 연주를 보게 된다면 반가울 것 같다. 문자를 받고 부러 율리아 레즈네바의 동영상을 찾아 보기도 했던 터라 조금 아쉬웠지만, 누가 무대에 오르든 나는 일개 초심자이므로 나쁠 건 없었다.
소프라노 박혜상은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 중 "디도의 탄식",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어서 와요 내 사랑",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방금 들린 그 목소리"를 불렀다. 합창석이다 보니 노래하는 뒷모습을 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오페라 연기하듯 팔을 뻗고 몸을 돌리는 등의 움직임이 더해져 그냥 성악곡을 들을 때보다 흥미로웠다. 듣는 것만으로 일별할 수는 없지만 제목만은 낯익은 오페라곡을 직접 들어본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평소 실력이 있겠지만 급박한 변경이었을 테고 그래선지 세 곡의 무대를 마친 후 협연자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사이의 찐한 인사에서 괜히 전우애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는데, 급변경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들의 커튼콜도 더욱 뜨거웠던 것 같다.
인터미션 후 2부의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이었다. 찾아보니 브루크너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오르간 연주자이며 오스트리아 낭만파의 거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당연히 초면이었다. 클래식 공연에서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는 건 약소한 경험과 눈치로 알고 있지만, 전곡이 1시간 넘고 한 악장이 20분은 될 것 같은데 끝난 후 잠시간의 적막을 그냥 바라보며 견디는 게 나는 좀 괜히 미안하고 불편했다. 물론 흐름을 깨는 일일 수 있고 그렇게 정해진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연주도 지휘도 음악가에게는 일인데 악장 사이에 박수를 쳐주면 어떨까 싶었달까.
실은 전곡 연주가 끝난 후의 기립 박수나 몇 번이나 반복되는 커튼콜로 몰아서 감동과 환호를 표현하는 게 내게는 조금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 느껴져서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은 내 입장에서 "풀려나다"보다는 듣는 맛이 있었지만, 엄청 빠져들지는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년 폐막 공연의 프로그램도 모두 친숙한 작품들만은 아니었는데 나름 엄청 감흥에 젖었던 걸 생각하면, 블라인드석이나 마찬가지인 합창석이어서 그랬나 싶기도 한데 잘은 모르겠다. 암튼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의 교훈은 오케스트라 공연이라면 합창석에는 앉지 말자는 것, 내게 오케스트라 공연은 듣는 것 만큼이나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매우 깨달았고 청각은 시각을 자극하며 인간은 소리에 의해 무척 큰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 역시 새삼 느꼈다.
공연 보러 가는 길에 무척이나 뜬금없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고 심기가 잔뜩 불쾌해졌었다. 발신자는 거론하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가 경험한 가장 파렴치하고 뻔뻔한 인물이어서 즐거운 마음의 산책길에 예기치 못했던 뾰족한 분노가 솟아났다. 눈치 없고 자아도취적인 인물이라 너의 연락이 불쾌하다는 말조차 전하기 싫어 없는 일인 셈치려고 메시지를 삭제하고 차단했지만, 공연이 시작된 초반에는 그 망할 연락 때문에 자꾸 딴생각이 났고 마음의 산란함으로 집중력이 흐뜨러지기도 했다. 나로서는 미친 새끼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의 몰염치한 연락으로 망친 몇 분이 너무 아깝고,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절감했다. 그래서 오늘의 공연을 향하는 마음이 조금은 겉돌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가는 길과 현장은 이렇게나 아름다웠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