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3. 1. 1. 23:18


개인적으로 동물원의 노래를 오랫동안 들어온 내게 이번 작품에서 가장 먼저 각인된 것은 제목이었다.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이미 10여년 전부터 들어왔던 노래의 이미지 때문인지, 내가 알고 있는 전경린이라는 작가와 책의 제목이 얼핏 합치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추억은 소중하게, 사랑은 아름답게, 절망도 부드럽게, 방황 또한 조심스럽게... 늘 그렇게 노래하는 동물원과 흔하게(?) 흐뜨러지고 뒤집어지고 무너지고 상처내는 그녀의 이야기들이, 눈에 확 들어오는 심플하고 팬시한 북디자인과 무크지처럼 예쁘게 꾸며놓은 책갈피를 보면서도 조금 의아스럽고 부조화스럽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작품을 탐독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책 속에는 자주 뭇여성들이 꿈꾸는 아주 매력적인 한 남자가 등장한다. 어느샌가 익숙해지기 시작한 활자의 이미지화를 따라 머리 속에 그려지는 풍경들 속에 그는 주로 늘씬하고 쓸쓸한 뒷모습을 가진 사내였고, 이번 작품에서는 유경이 그 역할을 맡았다. 시니컬하고 불안한 그의 등장 뒤에는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존재의 지극한 쓸쓸함이 숨겨져 있었고, 예상대로 그는 하얀 피부에 성마르고 외로우며 불가해한 신비를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 혹은 그와 같은 자리에 쉽게 무시하고 쉽게 빠져들고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진이 있으며 물론 그 사이에는 하염없는 희망과 그지없는 절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여자 은령이 있다.

그녀가 그려내는 세 사람의 일탈된 일상은, 어찌보면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한 편으론 누구나 꿈꿀 수 있기에 현실적이다. 극한의 대립점에 서있는 존재같이 느껴지는 유경과 이진은,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잠재하는 욕망 즉 정신과 육체, 모성애와 부성애, (치명적이지만) 낭만과 현실 같은 양립하기 힘든 부분을 각기 나누어 가진 남성이며 심지어 이들은 한 몸에서 나온 두 개의 영혼처럼 불가사의한 공감대를 이미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세 사람의 위태한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개인적인 매혹이다)한 사람의 자살과 가장 현실적인 한 사람의 등돌림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혼란스럽고 연약하지만, 제도 밖에서 더 안온해지고 마음의 평정을 얻는 은령은 전경린의 주인공답게 뭇사람의 눈으로는 쉽게 수긍할 수 없을 생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스물다섯 그녀가 유리로 만든 뱃전에서 떠돌던 낯선 바다가 아닌,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울고 웃고 희망하고 절망하는 일상이 지배하는 남루한 세상 속으로 말이다.

사실 책말미의 해설이나, 매체에서 접했던 이 책의 메세지는 물론 이런 가볍고 도식적인 얘기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봐도 탁월하고 마음에 꽂히는 그녀만의 언어로 자주 언급한 부분 역시 배반할 수 없는 '양부의식'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떠오른 그녀의 특화된 가족사나 현실적이고 스탠다드한 결혼 적령기의 남자 선모나 여자의 일생과 사랑의 본질을 설파하는 장롱 찾는 할머니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분명 건성은 아니었음에도 눈 떼지 못하고 읽는 내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마치 '캔디' 같은 은령과(알버트가 이진만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면...) '테리' 같은 유경의(사실 그 옛날 범람하던'캔디'의 결말은 TV에서 해줬던 하나의 버젼은 아니었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가슴 아픈 사랑 혹은 죽어도 이루어지지 못할 픽션의 안타까움이었던 것을.

그러나 전경린은 물론 탁월하다. 연필을 손에 쥐지 못한 전철 안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울 만큼 마음을 후벼파는 예리한 내면 묘사들. 중독된 자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여주는 그녀만의 표현들. 미처 상상치도 못했으나 너무나 들어맞아 소름이 끼칠만큼 찌릿찌릿한 비유들.

손에 든 초반부터 감히 순정만화를 떠올리며 캔디니 테리를 염두에 둔 것은, 작가의 속깊음과 행간의 뜻깊음을 간과한 미천한 독자의 경솔의 소치이겠거니...


2001-07-05 02:39,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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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전경린 (생각의나무,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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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