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은 나에게 있어 중단편의 작가다. 90년대 중반의 소설계에서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고 일정한 고정 독자군을 확보하며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동안 윤대녕이라는 이름은 내게, 동경해마지 않던 하나의 코드였다.
알건 모르건 포스트모던이라는 취급 용이한 하나의 사조가 각종의 지면을 장식하는 사이, 윤대녕은 사회니 집단이니 하는 한물간(?) 거대 담론의 앙상한 대의를 완전히 배제하고 개인의 삶에 천착한 작품을 쏟아놓고 있었고,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내적인 밀도와 진지성으로 인해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로 폄하할 수만은 없는 일정한 아우라가 분명히 존재하는 까닭에 횡행하는 사조에의 구속조차도 비껴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이유로, 윤대녕은 사회에 속한 한 개인으로서의 의무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양심의 소리와 파편화된 세상살이로부터 느끼는 허무와 패배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하나의 일탈 기제로 작용해 주었다.
몇 편의 장편이 있긴 하지만, 그의 소설에 뒤늦게 매료되어 허겁지겁 찾아 읽은 십수 편의 중단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존재에의 버거움에 눌려 중심을 잃고 떠도는.. 예외없이 반복되는 인물들은 나로 하여금 은연중 극한의 감정 이입을 경험케 했고, 그들만큼이나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고 떠돌고자 하는 영혼의 소리에 귀가 멀은 나에게 윤대녕의 소설 읽기는 가장 일상적인 위안을 가져다 줬다.
달의 지평선.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윤대녕 소설과의 차별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내가 아는 윤대녕은, 문학적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치와는 별개로 그것이 지난한 동어반복의 과정이건 어쨌건 간에 사회 속에서 부유하는 인물의 존재에 대한 번민과 그 여정에서의 신랄한 자기 발견의 과정을 그려나가는 작가였다.
더불어 그의 단편의 빛나는 부분은, 흔히 극도로 정제된 시적 언어라 평가 받는 공들여 선택한 언어의 진중한 아름다움과 반복되는 인물 양상과 사건(?)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개성이 빛나는 상황적 긴장감 속의 탁월한 감정 전이였다.
윤대녕이라는 이름을 두고, 일단 두 권이라는 분량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구조과 사건의 전개는 '달'이라는 하나의 매개를 축으로 풀어나간 이야기가 신화비평의 측면에서 볼 때 짜임새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후일담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강점에도 불구하고 생경한(?) 386세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전 작품들과 유사한 전개로 인해 오히려 그가 천착해 왔던 존재에 대한 순정한 성찰을 통속으로 흐르게 할 소지를 담은 불안한 설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중간 중간 삽입된, 흐름에서 돌출되는 에피소드와 인물들은 분량의 한계에 대한 작가의 부담일까 라는 추측과 함께 지루함마저 느껴져, 감정의 이완에도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후에 간행된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로 <달의 지평선>의 시무룩한 감상을 어느 정도 달랠 수는 있었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존재에의 성찰과 삶의 이면에 대한 비현실적 실감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묻어나는 새로운 작품을 기대한다.
윤대녕 소설에 대한 열광은 변함없이 간직한 채로, 그러나 양질전화란 그에게 기대할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1999-09-24 12:57, 알라딘
|
달의지평선2
카테고리
지은이
상세보기
|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흑백 사진 뒤에 가려졌던 삶의 열정을 보다. (0) | 2003.01.01 |
---|---|
진지한 순정 만화 같은 (0) | 2003.01.01 |
눈물 겹게 아름다운 저항, 희망이 있다면.. (0) | 2003.01.01 |
더 작은 소리였다면 (0) | 2003.01.01 |
감히 뭔가 보탤 수 없는 물렁물렁함에 대하여 (0) | 2003.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