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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잠든 인물의 숨소리와 극도의 클로즈업으로 영화는 첫 장면부터 긴장감을 안긴다. 이어 기상한 여인은 아침부터 바쁘다. 어린 두 아이를 얼르고 챙겨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기고 역으로 향하는 다급한 출근길. 파리 교외에 살고 있는 그가 파리 시내의 일터에 닿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하다. 역에 몰린 사람들은 대중교통 파업으로 제 시각에 도착하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급히 편성된 대체 열차에 빈틈없이 탑승한다. 그 속에 포함된 쥘리 역시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숨가쁘게 뛰어 출근카드를 찍는다.
쥘리는 고급호텔의 룸어텐던트로 일한다. 조장쯤 되는 그는 어려움에 처한 동료들의 민원을 접수해 해결하고 신입의 교육을 도맡는 중에, 은행의 대출금 입금 독촉 전화를 받고 양육비를 보내주지 않는 전 남편에게 독촉 전화를 한다.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출근길과 마찬가지로 전쟁이다. 약속한 시각보다 늦게 도착한 이웃집에서 아이들을 넘겨받고, 이런 식이면 아이들을 계속 봐줄 수 없다는 할머니의 하소연과 경고를 마주한다. 보는 사람도 기진맥진한 하루일과는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는 것까지 해내야 끝이 난다.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키우기 위해 선택한 파리 교외의 생활은,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쥘리의 안간힘과 희생으로 겨우 돌아간다. 아이들을 맡아주는 이웃집 할머니는 동네마트 취업 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도 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쥘리의 늦은 귀가가 반복되자 결국 더 이상 어렵다고 선언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아이들을 데리고와 눕히는 쥘리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할머니가 흘렸던 말을 떠올리고 동네마트에 찾아가보지만 믿을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경제학 석사이자 시장 연구 전문가였던 경력을 살리기 위해 이력서를 접수하고,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상사의 눈을 피해 면접에 참여하는 과정도 지난하기 그지없다.
영화는 파업으로 인한 교통난, 홀로 책임져야 하는 두 아이의 보육, 수차례의 시도에도 연결되지 않는 전 남편과의 통화, 오지 않는 양육비와 경제적 곤란, 다사다난한 일터와 단절된 경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 등으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쥘리의 일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와중에 다가오는 아이의 생일파티를 위해 트램펄린을 주문하고, 대체교통편이 배정되지 않은 막막함 가운데 파업 집회에 참여하러 가는 이웃의 차를 얻어타고, 여행에서 돌아온 유일한 동네 친구의 연락과 도움을 받고, 새 직장의 면접을 위해 나름의 수완을 발휘하며 땡땡이 친 일이 발각된다. 자신이 담당한 교육생이 해고된 데 이어, 결국 쥘리마저 해고 통보를 받고 나름의 연대감을 공유하던 동료에 의해 일터의 출입도 금지된다.
겹겹의 무게에 짓눌린 일상을 버티며 쥘리가 마지막 희망으로 부여잡은 건 2차 면접까지 보고 온 새 직장의 취업이었다. 과거 작은 물류업체에서 일하며 분석과 비판의 글을 남겼던 대기업, 하필 면접자는 쥘리의 흔적을 발견해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고 가부와 상관없이 알려주겠다던 면접 결과 연락은 오지 않는다. 해고자가 된 쥘리는 잠시 숨을 돌리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원하는 대로 함께 놀이공원에 간다. 그리고 절박함에 몇 차례나 먼저 전화를 했음에도 연결되지 않아 마음을 접었던 그곳에서, 출장으로 늦어졌다며 면접자가 최종합격 통보 연락을 해온다. 영화의 엔딩은 안도와 환희로 환한 웃음이 피어나는 쥘리의 얼굴이다.
한 사람의 한 시절을 그저 따라가듯 군더더기도 주변 서사도 거의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엄청 몰입이 됐다. 쥘리를 연기한 배우 로르 칼라미의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가 가장 큰 이유였고, 쥘리의 상황 만큼이나 급작하게 느껴지지만 앞서가지는 않는 음악도 한 몫한 것 같다.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기보다 주인공의 현재에만 주목하는 미니멀한 접근이 좋았고, 온수기를 수리하는 레오 아버지와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맞춘 쥘리의 급발진과 머쓱해하는 순간 그리고 그에 아무런 서사도 보태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나 동동거리면서도 대중교통 파업에 대해 존중하고 지지하는 쥘리의 대사도 기억에 남았다.
9/10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 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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