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반 만에 부산에 다녀오는 것으로 11월을 마무리했다. 월요일 오후 서면에 도착, 예약한 병원 두 곳에 들러 유방암과 자궁경부암 건강검진을 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봤지만 통영에서는 여의사 찾기도 어렵고 종합병원 외에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 서면으로 갔는데, 고급스럽고 세련된 인테리어에 아이패드 접수에 모두 여의사에 통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세계였고 대기자가 거의 없어서 신기했다. 작년 초 영화 보러 처음 서면에 가서 돌아다니며 어느 구역에 즐비한 병원들을 보면서 신기해했는데 내가 이용자가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밀린 숙제 같았던 검진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접수 때부터 검진 후 의사 상담에서도 은근히 영업스러운 멘트가 이어졌던 게 혹시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라면 통영 이전을 권해드리고 싶어졌다. 유방암 검진하며 불편한 왼쪽 어깨가 대충 바보 상태라는 걸 확인했지만 예상보다 신속하게 건강검진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진짜 여행 시작.
통영의 병원에서처럼 오래 기다리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첫날 영화는 한 편만 예매했고, 극장에서 멀지 않은 독립서점 겸 제로웨이스트샵에 들르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왔다갔다하던 은은한 몸살기가 느껴지기도 해서 잘한 일이다 싶었고, 숙소에서 좀 쉬다가 어둑해질 즈음 나락서점으로 향했다. 부산 제로웨이스트샵 검색하며 처음 알게 된 곳인데, cgv서면을 그렇게 왔다갔다 하면서도 도보 10분쯤 거리에 있는 그곳을 전혀 몰랐다니 역시 세상은 구석구석 모르는 것투성이다. 나의 목적은 제로웨이스트 제품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여쭤도 보고 예의롭게 적당히 구입도 하는 것이었는데, 작은 책상 하나에 비누바 몇 종류와 양말 정도가 전부여서 약간 당황. 독립출판물이 많이 있어 구경하면서 혹시 통영 관련된 책이 있을까 찾다가 사장님께 여쭤봤지만 없었다. 하여 나락서점의 환경 글쓰기 모임 기록이라는 책 [지구연대기]와 동백오일과 지게미가 들어간 비누바를 사서 나왔다.
첫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살펴볼 때 궁금했었는데 바로 개봉하니 반가웠고, 매우 좋았다. 몽글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으로 상영관을 나오니 월드컵 한국 경기 중계를 보러왔는지 로비에 사람들이 북적였고, 숙소에 가느라 지나는 서면 유흥가 골목에도 활기가 돌았다. 다음 날 첫 영화가 9시 30분인 관계로, 도착해서는 바로 씻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다정한 여행메이트 타이레놀pm의 힘을 빌어 자정 넘어 잠을 청했다. 어지간해서는 8시 전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좀 걱정했지만 잘 일어났고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 속에 길을 나섰다. 보도에는 밤새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고 떨어진 은행잎들은 끝물의 가을을 전하는 느낌, 한산한 거리를 걸어 극장으로 향하는 아침 기분이 꽤 근사했다.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도 부산국제영화제 때 시간이 안 맞았던 영화, 엄근진 모드의 소개 때문에 약간 긴장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이어 [파이어버드]를 보고 숙등역 인근의 천연제작소 부산점으로.
온전한 제로웨이스트샵은 처음이고 사사로운 목적도 있는 방문이어서 계단을 올라가며 살짝 숨을 골랐다. 가게에는 직원분만 계셨는데 부담없이 편안하게 맞아주셔서 통영에서 제로웨이스트샵을 준비하려는데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찾아왔다고,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는지 먼저 여쭤보고 염치없을 만큼 제품들의 사진을 엄청 찍었다. 이십여 분 꼼꼼히 둘러보고 바구니에 살 물건들을 담아 계산대로 갔더니, 보시면서 궁금한 거 없으셨냐고 뭐든 물어보라고 하시길래 되는 대로 말을 꺼냈다. 그때부터 직원분이 매대마다 머물며 제품과 제작업체에 대한 설명부터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폐를 끼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섬세한 친절함이 정말 고마웠고, 일단 내가 써봐야지 싶어 주섬주섬 고른 물건들의 총액이 내 생일 날짜에 00을 붙인 숫자여서 괜한 의미 부여에 한몫했다. 감사한 마음에 가방에 있던 달고나초코바와 젤리를 드리고, 가게 오픈 준비 본격적으로 할 때 다시 인사드리기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당연히 여전히 막막하지만, 친절한 직원분 덕분에 두터운 장막 한 겹이 환히 벗겨진 기분이었다.
다시 극장으로 돌아가 [존 덴버 죽이기]를 보고 숙소로 향했다. 시간상으로는 영화 한 편 더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지만 마땅히 볼 영화가 없기도 했고, 하루 네 편은 이제 정신력과 체력이 못 따라주니 어쩔 수 없었다. 숙소는 부산국제영화제 때도 머물렀던 테라스가 있는 곳, 여행페스타 쿠폰 덕분에 이번에도 거의 반값에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선택의 가장 큰 이유는 테라스였는데, 프론트는 매우 친절했지만 지난 번에도 이번에도 내부의 청결도가 매우 떨어졌다. 심지어 자기 전에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 커버를 열자 작은 바퀴벌레가 나와서 식겁, 다행히 휴지 둘둘 말아 변기에 떨어뜨리고 물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을 했는데 잠을 청하려니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이벤트 쿠폰 없으면 예약하기 어려운 금액이니 다시 갈 일 없겠지만, 혹여 그런 기회가 있어도 다시 가지 않을 곳이 되었다.
마지막 날의 영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와 [본즈 앤 올]. 일반관 무료 쿠폰이 있었고 그 시간대에 볼 영화가 그것뿐이어서 애니메이션도 뮤지컬 영화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믿고 선택했는데, 피노키오를 보며 눈물을 흘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제페토가 피노키오 만들었고 거짓말 할 때 코가 길어진다는 것 말고는 원전의 사건이나 줄거리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푹 빠져서 보았고 마음이 시큰해졌다. [본즈 앤 올]은 부산국제영화제 때 추가 상영 소식을 들었으나 아침이어서 포기했었는데, 공포영화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티모시 샬라메 때문에 용기를 냈다. 본 게 거의 없지만 보통의 공포영화와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전면에 내세운 설정의 도착성 때문에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이 많지는 않았지만 두어 번은 눈을 내리깔아야 했고 양 옆에 바로 관객이 있었던 터라 무거운 가방을 안고 보느라 몸과 마음 모두 쉽지 않았다. 티모시 샬라메 덕에 이런 영화를 다 보네 생각했지만, 표면적인 서사 뒤에 가려진 의미를 곰곰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로비에 사람이 적지 않았다. 12월까지가 기한인 매점 무료쿠폰이 2개 있고 나는 쓸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을 잠시 살피다가 교복 입은 여학생 셋을 찾았고, 좀 놀란 듯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어서 그중 한 명과 키오스크 앞에 가서 콤보와 팝콘 주문 완료. 영화 재밌게 보시라 인사하고 극장을 나왔다. 6시 50분 통영행 버스는 기사님의 예술운전으로 69분 만에 터미널 도착, 부산을 오가며 수십 번 버스를 탔는데 최단시간이었던 것 같다. 귀가길에는 버스를 두 번 타야 했지만 121번을 탄 덕에 강구안을 지나왔다. 집에 오니 꽤 피곤했지만 11월이 다 갔다는 생각에 후련했다. 숙제처럼 여기던 일들을 잘 마쳤고, 여섯 편의 영화 중 다섯 편이 꽤 좋았으니 아주 성공적. 12월부터는 여섯 달 동안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던 심리적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 무엇보다 홀가분한 기분이다.
'사는게알리바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영화여행, 2022 마지막 (0) | 2022.12.30 |
---|---|
제주, 오랜만 (0) | 2022.12.14 |
2022 비프, 마지막 4일차 (0) | 2022.10.13 |
2022 비프, 3일차 (0) | 2022.10.12 |
2022 비프, 2일차 (0) | 2022.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