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페스타 쿠폰으로 테라스룸 숙소 이틀을 일찌감치 예약했다. 제주랑 서울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낯선 곳에서 쾌적한 숙소에 머무는 일에 약간 중독이 됐는지, 주말의 책 모임을 마친 후 집 정리를 대충 해놓고 나서는 연말 나들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숙소 예약을 일찍 해서 연말에 어떤 영화들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패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cgv서면 아트하우스관 시간표를 확인하며 보여주는 대로 영화를 예매했다. 그러다 보니 꼭 보고 싶었던 영화는 [가가린]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의외로 괜찮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가 있는 날 할인 시간대에 영화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방학을 맞은 학생들 덕에 로비는 붐볐지만 다행히 상영관은 그렇지 않았다. 마리옹 꼬띠아르의 열연과 장중한 대곡 "non, je ne regrette rien"의 압도적인 엔딩이 영화의 산만함과 지루함을 상쇄해준 [라 비앙 로즈]를 보고, 이어 큰 기대는 없이 [크레이지 컴페티션]을 보았는데 의외로 많이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페넬로페 크루즈,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함께 출연했으니 실망스럽지는 않겠거니 정도의 마음이었는데,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이야기와 웃음 포인트, 영화의 만듦새까지 너무 깔끔해서 앞으로 스페인 영화를 좀 챙겨봐야겠다 싶은 느낌이었다.
쿠폰이 아니라면 경험하기 어려운 숙소는 쾌적했다. 극장에서 12분쯤 걷는 거리였지만 이제껏 가보지 않은 구역에 위치해 낯설었는데, 동천을 따라 걷는 밤길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불안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영화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세 편이어서 늦은 시각이었지만 여유롭게 배구 중계를 보았다. 이따금 테라스를 드나들며 한심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바로 남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독립적인 테라스라는 걸 절감했다. 언젠가 이런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살게 된다면 방에서 나가지 않고 며칠씩 생활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 다음 날은 내내 숙소에 머물며 나름 정리하기로 목표한 일을 적당히 마무리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향했다.
[가가린]에 앞선 두 영화는 안 봐도 무겁고 지루할 것이 예상되어 살짝 걱정이었는데, [라스트 필름]보다 [메모리아]가 훨씬 대단했다. 전수일 감독의 영화는 따져보니 네 번째 보는 것인데, 의미심장한 제목에 찾아본 기사를 확인하고는 흔쾌한 마음이 되었다. 따로 흔쾌한 마음을 가질 만큼 각별했던 적은 없지만,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젊은 시절 품었던 영화의 꿈을 힘겹게 밀고온 한 사람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달라지기도 했다. [메모리아]는 자자한 명성에 궁금증과 호기심 만큼이나 우려도 적지 않았는데, 나로서는 매우 힘든 영화였다. 긴장과 불안을 한 겹 깔아놓은 분위기도 그랬지만, 내가 뭘 알까마는 후반부의 '저장 장치와 안테나'니 뜬금없이 등장하는 비행체에서는 솔직히 낭패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기대했던 [가가린]이 앞선 두 작품에 눌린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펴준 덕에, 새벽 1시를 전후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어둡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 날의 마지막 영화는 아티스트 무료쿠폰으로 예매한 [코르사주]였다. 연기를 잘한 덕이겠지만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의 비키 크립스가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캐릭터와 동일시한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듯한 영화가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체크아웃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 찰나 '본인상' 부고 문자가 도착했다. 지난여름 어느 밤, 통영에 왔다며 느닷없이 연락을 해왔던 이였다. 이주하고 전화기를 바꾸며 대부분의 번호를 지웠고, '모르는' 010 번호는 받지 않는데 부재중 통화가 뜬 후에 또 울리기에 혹시 바뀐 집주인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었다. 집에서 차로 5분이면 가는 곳이었지만 상황도 그랬고 갑작스레 보자는 것도 내키지 않아 나가지 않았었는데, 마지막이었구나. 전 직장 동료와 M에게서도 연락이 왔는데, 황망하기는 했지만 슬프지는 않아서 이상했다.
아무려나, 마음 잘 추스리라는 M의 말을 곱씹으며 마지막 영화를 보러 들어갔고 집중했다. 예상대로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였던 엘리자베트의 캐릭터가 팔할 이상을 차지하는 영화였고, 이따금 [스펜서]가 떠올랐지만 그와도 다르게 나로서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엘리자베트의 마지막 선택은 파격적이고 전복적이었지만 약간 시원했고, 영화관을 나와 다시 세상에 돌아온 듯 부고와 마음 잘 추스리라는 M의 말에 대해 생각하며 터미널로 향했다. 일 때문이든 마음 때문이든 한때 가깝게 지냈던 많은 이들과 동떨어져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관계나 인연에 대해 갈수록 무의미하고 냉담하게 느끼는 스스로를 감지한다. J형님의 느닷없는 부고에 대해서도 실은 그랬고, 잠시 가봐야하나 생각했지만 조의금만 보내고 말았다. 마음도 정처도 없이, 무기력에 기대어 순간의 편안함에만 집착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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