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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게알리바이2024. 11. 14. 23:37

 

 

몇 년간 영화를 보기 위해서만 갔던 부산에, 다른 목적으로 다녀왔다. 내년 1월 중순 계약 만기와 함께 통영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다음 서식지는 바다와 영화가 공존하는 부산으로 결정했다. 4년 전처럼 한 달 살기로 집을 알아보기는 여의치 않아 두어 달 전부터 네이버부동산에서 전세 현황을 나름 모니터해왔다. 불안한 마음에 이사예정일보다 너무 이르게 집을 구하러 다니다 불가피하게 두 달을 월세로 살고 전세로 전환하는 번거로움을 겪었던 시행착오를 떠올리며, 이사 두 달 전쯤 집을 찾아보기로 했고 그게 이번 주였다.

 

한 달 전부터 탐색하며 괜찮을 것 같은 집들을 찜해놓았고, 지난주에는 남아 있는 곳들 중 궁금한 몇 곳을 찍어 부동산에 연락했다. 수십 번 왕래했지만 넓은 부산에서 친숙한 곳들은 영화관 주변뿐이다. 지도앱에서 cgv서면, 영화의 전당, 모퉁이극장 등을 검색해 찜한 집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낭만적인 온라인 임장질로 워밍업을 마쳤는데, 현실은 달랐다. 사는 건 매일이고 영화 관람은 가끔이니, 지역보다는 예산과 내부 컨디션을 우선해야 했고 바다가 가까우면 좋겠다는 바람은 애써 후순위로 미뤘다. 일단 월요일 저녁에는 서부산터미널 주변 사상구, 화요일 낮에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사하구, 저녁에는 조금 이동해 수영구의 집들을 보는 걸로 약속을 잡았다. 

 

집을 보여주기로 한 분의 시간에 맞추느라 월요일 저녁 서부산터미널에 도착해 여섯 군데의 집을 보았다. 한 집이 궁금해 연락하면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사상구는 교통이 편리하고 편의시설들이 밀집한 곳이라 집의 면적이나 컨디션에 비해 가격대가 높았다. 문의했던 복층 테라스 오피스텔은 좁은 데다 구조가 조악했고, 중개사가 보여준 다른 집들도 굳이 그쪽에 살아야 하는 게 아닌 입장에서 매력이 없었다. 저녁 시간에 여러 집을 보여주신 중개사님께는 미안했지만 사상구는 후보에서 제외, 버스를 타고 숙소를 예약한 남포동으로 향했다. 대학 시절 2회 부산국제영화제로 난생처음 부산에 왔을 때의 인상이 각별한 곳이어서, 버스에서 내려 마주한 맞은 편 골목의 피프광장 표식에 괜히 마음이 설렜다. 

 

숙소는 그리핀호텔. 다른 방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묵은 508호는 창문에 벽돌 패턴의 벽지를 붙여 놓은 듯, 창과 옆 건물 벽이 거의 붙어 있어 뷰는커녕 외풍이 스며들었다. 제법 호텔스러운 프런트에 비하면 방은 그냥 모텔 수준이었고 창으로 들어오는 한기 때문에 커튼을 닫아두니 감금된 느낌. 쾌적함도 포근함도 미진한 방이 춥기까지 해서 냉난방기를 틀었으나 찬바람이 나왔다. 다시 조작하고 기다리고를 반복해도 마찬가지여서 프런트에 물었더니 냉난방은 중앙에서 제어하는데 아직 냉방 모드라며 전열기를 갖다 줬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세 계절 창고에서 묵으며 뽀얗게 먼지가 앉은 전열기를 그대로 전하며 한껏 친절한 태도를 보인 직원에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부산행 버스에서 몇 십 년만인지 모를 멀미에 속이 많이 불편했고 숙소도 여러모로 저조한 관계로 피곤이 몰려왔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며 ‘피프광장’에 잠시 반색해 밤 산책을 떠올렸던 마음은 사라졌고 푹 쉬다가 일찍 자기로 했다. 배구 경기가 없는 날이어서 볼만 한 프로그램을 찾다가 ebs 지식채널이 있어 플레이했는데, 백석 시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서울에서 일하며 오래 준비했던 통영 이주를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상징적으로 이끌어줬던 존재가 백석 시인이었는데, 적응에 장렬히 실패하고 새로운 이주를 준비하는 마당에 조우하니 새삼스러웠다. 통영행을 앞두고 신조처럼 되새겼던, 여전히 휴대폰 배경화면인 “선우사”까지 마주하자니 우연치고는 신기하기도 했다. 무의미의 신만은 아무데나 의미 부여하는 자의 편인 것인가.

 

화요일에는 우리 동네가 될지도 모르는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아홉 곳의 집을 보았다. 특정 매물에 대해 문의했지만 원하는 조건을 확인하고 함께 볼 수 있는 집들을 미리 섭외해 보여준 중개사도 있었고, 미리 약속했음에도 도착 전 확인 문자를 보내자 그제서야 아파서 못 나갔다며 관리인 전화번호를 전해주는 중개사도 있었다. 사하구에서 본, 경사진 골목과 언덕을 올라야하지만 내부가 깔끔하고 바다가 보이는 한 집이 마음에 들었는데 보자마자 결정하는 건 경솔한 일 같아 결정을 미뤘다. 매매와 전세 둘 다 내놨고 이사예정일이 임박해 다른 데서도 계속 보러 온다는 그 집을 놓칠까봐 걱정도 됐지만, 한 달 넘게 계약이 안 됐는데 고민하는 하루 사이에 누군가 계약한다면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수영구로 이동해서 본 집들은 무척이나 언덕에 위치해있었다. 다락과 옥상이 있는 집도 나쁘지 않았는데 과자질 봉인 해제각인 데다, 낮에 본 집이 아른거려 마음에 차지 않았다.

 

세 지역 중에서 결정하지 못하면 수요일과 목요일에 다른 지역의 찜했던 집들을 보러가는 걸로 생각하고 왔는데, 이틀 동안 열다섯 군데를 보고 나니 약간은 감이 오는 느낌이었다. 바다가 보였던 집으로 마음은 점차 기울었지만 척박한 주변 환경에도 생각이 미치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다 가질 수는 없고 한 번은 결정해야 하는 거니까. 수요일 오전에 부동산에 연락해 가계약을 하기로 하고, 집을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가계약금을 입금하고 부동산에 부탁해 평면도를 인쇄하고 미리 챙겨간 줄자로 대략의 사이즈도 측정해 메모하는 걸로 이번 부산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마쳤다. 다음 숙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동네를 둘러보고 감천문화마을을 고지 삼아 산을 넘어서 남포동까지 걸었고, 여행자처럼 피프광장을 구경하다 서면으로 이동했다.

 

집 구하는 게 어떻게 될지 몰라서 다른 숙소들도 예약해 4박 일정으로 왔고, 2년 전 검진했던 산부인과에서 자궁경부암 공단 검진도 예약한 터였다. 실은 영화도 짬짬이 예매했었는데 월요일과 화요일은 취소했다. 수요일 숙소는 노블온 숙박권으로 예약한 프롬에이치 레포잉호텔, 오픈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게 지겹지만 옥상정원에서 과자를 먹을 수 있고 시설이 전반적으로 깔끔한 데다 방에 전자레인지가 있어 몇 번 묵었던 곳이다. 체크인 전에 옥상에 올라가 과자를 먹고, 푹 쉬려고 입실했는데 짐 풀고 텔레비전을 켜니 고장이어서 다 풀었던 짐을 다시 챙겨 방을 옮겼다. 별 건 아니지만 1차 짜증이 났는데, 다음날 체크아웃하며 짐 보관하러 안내된 사무실에 가니 아무도 없고 공사 중인 데다 전화 연결도 안 돼서 2차 짜증이 났다. 시설에 비해 관리가 엉망이란 건 전에도 경험했지만 마지막까지 꾸준하니 인정.

 

목요일에는 고대했던 영화들, [마리우폴에서의 20일]과 [아노라]를 보았다. 몇 년간 부산행의 주목적이었던 곳에 며칠 만에 오니 혼자 괜히 감개무량.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오전 10시 상영인데도 뒤쪽 좌석 세 줄이 다 차있어서 뭘까 했는데 군인 단체 관람이었다. 영화는 다큐와 픽션이라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각각 다른 의미로 둘 다 좋았다.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시민들과 얼마 후 함락된 마리우폴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전쟁의 가해자 러시아를 본 후에, 국가에 대한 가치 판단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이반의 가족과 관계자들과 이고르 그리고 아노라의 선대로서의 러시아를 접하는 건 뭔가 쉽지 않은 여운을 남겨주기도 했다. 국가와 그 구성원에 대한 동일시나 어떤 대상에 대한 일면적 인식이 가지는 오류에도 생각이 미치지만, 게으른 자에게는 어려운 사유다. 

 

수요일에 가계약을 한 후에 목요일 영화 예매를 하면서, 금요일이었던 산부인과 검진 시간을 영화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변경했다. 예약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바로 검진이 가능했고, 숙소 체크인까지 한 시간이 비었다. 가방이 무거워 돌아다니기는 힘들고 카페에 들어가기는 아까워서, 옆 건물의 치과로 들어갔다. 어차피 공단 검진과 스케일링을 해야 해서 그냥 들어가 봤는데, 거의 대기 없이 진행됐고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친절했다. 통영에서 검진이나 진료 받으러 병원 갈 때마다 한 시간은 기본인 대기 시간에 여러모로 마뜩잖은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걸 생각하면, 다른 세상 같았다. 예정에 없던 검진 하나를 해결하고 무척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마지막 숙소로 향했다.

 

금요일 숙소는 여기어때에서 늦은 입실 이벤트가로 예약한 서면비즈니스호텔J라는 곳이었다. 저렴한 가격이라 변경이나 취소는 불가. 수요일 가계약 덕분에 부산행의 오점이 된 셈이지만, 돈 날리는 건 아까우니 큰 화면으로 배구 경기 볼 수 있는 걸 위안 삼기로 했다. 건물에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어 입구에서부터 찜찜했는데, 배정된 608호는 카운터에서 한참 들어가 B동이라 이르는 곳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방으로 향하는 계단에 갖은 기물들이 널브러지고 쌓여 있어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고, 자투리 공간을 개조해 만든 듯한 객실과 욕실 역시 찝찝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부분부분 빛바랜 벽지, 옆 건물 벽과 맞닿은 창문과 낡은 창호, 먼지 덮인 티슈커버, 얼룩진 의자, 은은한 방과 달리 확연한 욕실의 곰팡이 냄새까지. 

 

문을 열자마자 불쾌감이 솟구치는 숙소는 오랜만이었다. 통영에서 처음 부산영화여행 가며 돈 아낀다고 2만 원대에 예약했다가 기겁했던 모텔이 떠올랐고, 2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멋모르고 잡았다가 젊은 패기로 버텼지만 나중에 지인이 듣고 기겁했던 남포동 시장통의 여인숙도 떠올랐다. 현실을 부정하며 텔레비전을 틀었지만 마땅히 볼 게 없었다. 망연자실을 가장해 그냥 나갈까 말까 심히 갈등하던 중 나타난 모기 한 마리 덕에 마음을 굳혔다. 살짝 부려놓았던 짐을 다시 싸고 나가서 카운터에 퇴실하겠다고 하니 다른 ‘멀쩡한’ 방을 보여줬는데, 나름 장고 후의 결정이었고 숙소 자체에도 정이 떨어져서 그냥 나왔다. 다행히 퇴근시간 전이어서 사상역까지 지하철은 쾌적했고 통영행 버스도 평소보다 빠른 75분 만에 도착, 빨리 갈 욕심에 터미널에서 집까지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지만 총 이동시간은 양호한 편이었다.

 

금을 이렇게 날리는 건 평소에 없는 일이지만, 돈 아끼자고 볼 일 다 봤는데 찝찝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건 더 멍청한 일이다. 가계약 후에 다시 집을 보러 갔을 때 중개사가 줄자 챙겨온 걸 놀라워했는데, 서면비즈니스호텔J 예약은 이런 준비성과 알뜰함이 과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잊어버리기로 했는데, 가끔은 과유불급이지만 어쨌든 알뜰함과 준비성은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려나, 3박 4일 동안 다양한 불편을 장전한 세 군데 숙소를 경험하고 돌아온 집은 너무나 편안하다. 집 구하기라는 중요한 과업을 완료했고,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보았고, 공단 검진도 두 가지나 했으니 이번 부산행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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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