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 '세속도시의 즐거움'이 있던 시절, 같은 골목에는 나무 창문과 나무 문이 있는 '나팔소리'라는 까페가 있었다. '나팔소리'에 처음 들어섰던 낮 시간, 주인 언니는 아무도 없는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이따금 담배를 피웠다. 그 무렵 부러 찾아가 본 광화문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들은 어쩐지 좀 이물스러웠고, 오히려 내게 더 윤대녕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공간이 '나팔소리'였다. 대학로 길거리에서 마주 치면 서로 누군지 떠올리지 못하는 채 반가운 안면의 기억으로 인사를 주고받곤 했던 주인장 아저씨가 있는 '세속도시의 즐거움'이 어느 날 피난가듯 문을 닫아버린 후 그 정겨운 골목에서는 '나팔소리'만 조용히 불을 밝혔다. '나팔소리'를 마지막으로 갔던 날은, 역시 이제는 사라진 '리버피닉스의 아이다호' 까페의 처음이자 마지막 모임이었다. 이따금 어디선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와 마주칠 때마다, 늘 연달아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세속도시의 즐거움, 나팔소리, 리버피닉스의 아이다호 그리고 이제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불과 오 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사라진 실물의 괴리를 메우는 망각은 무서운 것이어서... 나는 벌써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은 몹시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낯섦에 따라붙은 뒤라스의 책. 이런 느낌은 싫어하지 않지만 이런 문체는 좋아하지 않는 탓에, 감당할 수 없는 열정에 저항하듯 아들을 동반하고 떠다니는 안 데바레드와 희멀건 회색빛 항구에 면한 쓸쓸한 라 메르 가의 느낌 정도만 기시감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이 책을 다시 끄집어낸 건 순전히 작고 가볍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오는 날 거리로 나가는 길, 어쩐지 이제 이런 느낌은 내게서 좀 떼어내고 싶다는 욕심에 차라리 젖어버려라 하는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기갈이 들린 듯' 집 반대편의 까페로 '산책'을 나서는 안 데바레드는, 자기 속의 욕망을 충동질한 치정의 살인사건을 목격하기 전에도 결코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살아본 적이 없는 여자다. 주어진 일상의 존재 범위를 결코 넘어서 본 일이 없는 그녀가 몽환적인 대사들을 주고 받으며 아슬하게 경계를 걷는 일 역시 전혀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적막할 만큼 고요한 대화가 오고 가는 중에도 뇌수를 찌르는 듯한 긴장과 초조가 행간을 팽팽히 조여오는 느낌, 이런 기분 모르지 않아 라고 책장 속 그들에게 고백하고 싶을 만큼 아찔하고 한편 매혹적이다. 퇴폐적이고 황량한 마음을 부려놓을 데 없어 속수무책으로 누군가를 갈망하고 제 풀에 기진맥진해버리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 건, 어떨 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빠져들기 시작하면 한이 없고, 고개 돌리기 시작하면 또 아무 것도 아닌... 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 꺼내든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후 내가 향한 곳은 <지울 수 없는 역사 -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목의 강연장이었다. 열변과 울분에 목이 메이고 말을 잇지 못하는 강연자의 절절한 이야기는, 그래도 대략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고개 숙이게 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만 가방 안에 넣어다녔음에도 책은 비에 젖지 않았고, 오 년 만에 다시 만난 안 데바레드의 불안과 간구 역시 여전히 마음벽을 긁어댄다. 빗물 따위로 잠재울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부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마음마저 재단하려는 어설픈 욕심의 어리석음을 다시 확인했을 뿐. 시간이 흘러 낯설어진 것이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담담히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
2006-07-22 01:4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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