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20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라고 당연히 믿고 살아왔던 경찰의 폭력에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고, 국민의 권리를 지켜준다던 법에 의해 유린당하며 평생 나랑 상관없을 것만 같았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 백일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KTX의 꿈은 '꿈의 속도'로 추락했다, 윤선옥 . 17쪽
 

우리가 겪어보기 전에는 내가 속해 있는 이 사회에 우리와 같은 투쟁을 하는 이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리가 뭉쳐 외치기 시작하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생기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 정미정 . 46쪽
 

사회에 첫발을 들여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꿈에서 서서히 깨어났고, 각박하다고 말하는 세상의, 그 적나라한 현실을 몸소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던 중에 파업의 '파'자도 몰랐던 내가 파업이란 것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낄 수 없었던, 극한의 고통과 분노, 공포와 긴장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낸 날이 어느덧 백일에 가까워온다. 어제는 지나가는 KTX 열차를 보고 눈물이 났다, 유나영 . 57쪽
 

집을 떠나 파업이라는 것을 시작한 지 벌써 백일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엔 2년 동안 당한 일들이 너무 억울해서 시작했고, 그 다음엔 정당한 것을 그렇지 않다고 억지 부리는 그들이 너무 미워서... 그리고 이제는 법과 공권력까지 동원해 우리를 회유하고, 협박하는 그들에게 공정하라고 소리치고 일깨워주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 이 여행이 끝나길 바라며, 남소영. 63쪽
 

그동안 참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변한 이유는 비겁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저이기에 후에 저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것을 정당한 것이라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부모님이 보고파 울지 않습니다, 홍수진 . 72쪽
 

이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비정규직이 무엇인지 알려고 들지 않았던, 아니,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단정지어버렸는데 마치 이전의 나를 비웃듯 나의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닥친 현실을 비난하진 않는다. 파업을 통해서 사회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은 무심히 지나쳐버렸던 무심하고 적당주의자였던 내가 이제는 정당한 일에 대해서는 소리 내어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KTX 승무원이 아닌 해고자다, 최소영 . 78쪽
 

언제부터 일하는 사람을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구분하였던가! 이 모든 과정이 힘 있는 사람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서글프고 치가 떨린다. 이것이 내가 이 싸움을 절대 포기 못하고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어두운 터널을 우리들은 걸어왔다, 박지예 . 84쪽
 

가슴에 못이 천 개는 박힌 듯한 느낌이 든다. 노동부, 법, 대통령, 이철 사장, 정치인들이 내게 남긴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TV에서 파업하는 장면을 보면 왜 저렇게 파업을 하지? 그냥 대충 잘 다니면 되지, 이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 파업을 통해서, 세상일이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지만, 우리가 옳기에, 이 파업이 정당하기에 동지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 김경미 . 89쪽
 

이번 파업으로 난 철부지 20대 여성에서 진정한 노동자로 거듭났고, 이제껏 보아오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들을 보며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 배움과 깨달음만으로도 난 이번 파업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난 이 상황을 피할 수 없고, 내가 물러서면 안 될 현실이기에 지금 이 상황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련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겠다. 나를 떠난 그 동지들에게 먼저 손 내밀어 내가 먼저 그들을 용서할 수 있기 위해... 너무나도 서럽고 가슴 아팠다, 이혜정. 98쪽
 

시간이 만들어 내는 초조함에 져서 내 길을 바꾸고 싶진 않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지 '철도공사의 정규직 승무원'이란 단순화된, 대표화된 요구만은 아니다. 해준 약속을 지켜주고, 한 만큼 알아주고, 되돌려주며 사랑과 책임감 있는 삶을 누리게끔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의 이 소박하고 당연한 바람이 거절당해도 죽지는 않는다. 다만 오래도록 상처가 남아 딱지가 앉을 것이다. 바르게 살아도, 간절히 바래도 상처만 받고 끌날 수 있다는 것에... 기다림만큼 완벽한 것은 없다, 김지원 . 107쪽

 
 

투쟁 100일을 훌쩍 넘긴 KTX 승무원들의 글이 문집으로 엮여져 나왔다. 총리 면담을 위한 국회 농성, 강금실 후보 사무실 점거 농성, 대량 문자 해고, 지도부의 단식 등으로 KTX 승무원들의 투쟁은 잠깐씩이나마 이슈가 되어왔다. 커다란 충돌이나 선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이 대체로 그들만의 필사적인 싸움에 그치고 마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많이 알려지고 언론에서도 다루어진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그녀들에 대한 일부의 호의적인 시선과 별개로, 문제의 해결이 쉽지는 않을 거란 느낌도 들어 안쓰럽기도 하다. KTX 승무원들의 투쟁은 비정규직 문제와 불법파견 문제의 핵심을 정조준하고 있다. 소관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철도공사와 이제는 사라져버린 한국철도유통 그리고 새로운 위탁업체로 전원 해고를 통보한 KTX관광레저 사이에서 절규하던 그녀들은 이제 노동부와 국가인권위를 압박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난생 처음 겪는 차별과 부당함에 대한 억울함으로 시작된 투쟁이 이제는 우리 시대 노동 문제의 본질을 부각시키며 그녀들을 투사로 둔갑시켰다. 극도의 취업난 속에 100:1이 넘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지상의 스튜어디스'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그녀들, 어쩌면 감히 '온실 속의 화초'라 말해도 틀리지 않았을 그녀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끈질긴 투쟁 속에서 동료가 아닌 동지로 서로를 바라보고 설령 이 투쟁이 패배한다해도 바른 길을 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한 명의 노동자로 거듭나고 있음을, 그녀들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리방에 굴러다니는, 이제 막 분노를 알게 된 새내기가 적은 날적이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면서도 조금은 반갑고 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짐짓 외면했던 문제의 당사자로 거듭난 그녀들은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련된 화장과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고객님을 향해 환한 미소를 날리며, 한편 착취와 억압 속에 온갖 궂은 일과 부당한 처우를 감내해왔다는 그녀들. 하지만 더 이상 인형이기를 거부한 그녀들은 이제 노동자인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훗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르는 이 투쟁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대충 적당히만(?) 했어도 결코 길거리로, 대합실 찬 바닥으로 나올 일 없었을 그녀들을 모진 투쟁으로 내몰고야 만 현실은, 우리 사회가 모순의 정점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도노동자들의 성금으로 제작되었다는 이 책, '저 별빛'이라는 제목이 붙은 제4부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의 기고글이 실려있다. 소박하고 어설픈 이 책은 이제 동지와 투쟁을  알게 된 KTX 승무원들에게 눈물 겨운 연대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백무산 시인의 시,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아 기억하자, 노동자는 언제나 깨어져서야 승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정말로 'KTX 승무원' 그녀들의 이름이, 이 땅의 비정규직 불법파견 노동자 문제 해결에 물꼬를 트는 희망의 이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2006-08-02 01:4, 알라딘

 


그대들을희망의이름으로기억하리라KTX여승무원문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철도노조KTX열차승무원지부 (갈무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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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