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인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반가운 제목이기도 했다. 감히 노동자라 이름할 수 없는 널널한 삶을 살고 있지만 '쪼끼' 입은 아저씨들만 보면 줄곧 환장을 해온 내게 노동운동은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그저 고맙고 그저 미안한 대상이며, 여전히 진심어린 응원과 지지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피상적 열광과 별개로 노동운동에 대한 나의 몰이해와 무지는 엄청난 것이어서, 지난 학기 수업때 '산별노조'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어느 노조간부샘의 발제를 듣고 알게된 작은 사실 하나가 얼마나 새롭고 기뻤었는지 모른다. 궁금하면 공부도 좀 하고 찾아보면 될 것을 싶지만, '노동'으로 시작되는 대부분의 문제는 솔직히 생각만 해도 좀 복잡한 느낌이고 어쩐지 어려울 것만 같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노동운동을 비판하려면(제1장), 파업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제2장), 노동운동을 용납 못하는 사회(제3장), 노동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제4장),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제5장) 이라는 소제목의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대체로 세 쪽 내외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20년이 넘게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저자가 경험한 이야기들은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쉽게 풀어쓴 글들이어서 어렵잖게 읽을 수 있다.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저자의 주장을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노동3권 보장의 세계적 보편성과 노동조합 활동의 정당성 그리고 평등 사회 구현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은 노동자의 권리 향상이라는 것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이라는 저자의 역설은 어쩌면 좀 선언적이고 단정적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과 노동조합을 백안시하는 시선들 그리고 일부 노동조합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언급을 슬며시 비껴가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기적이고 투쟁에 매몰된 노동조합, 비리와 부정으로 정당성을 잃은 민주노총 운운하는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폄훼들에 대해서도 오히려 노동조합 자체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조직이며 노동자들이 제 권리를 찾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 진보의 전제조건임을, 그리고 오랜 경험에서 체득한 노동운동 현장의 진정성과 이타성에 대한 확신의 예화들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투쟁하는 노동자와 비타협적인 노동운동에 대한 일각의 비판이 마치 정당한 듯 보이는 착시현상이 바로 노동자의 권리의식에 대한 제도교육의 부재와 우리 사회의 기형적 구조로 인해 야기된 문제라는 저자의 이야기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민중의 소리'니 '참세상'이니 열심히 돌아다니며 세상 소식을 접하다보면 메인에 띄워져 있는 그 시기의 주요 이슈를 다룬 뉴스들은 그 날 그 날 바뀌기 마련이지만, 늘 한 구석에 붙박이처럼 떠있는 소식은 어디 노조가 벌이고 있는 투쟁에 대한 비인간적인 탄압 혹은 어느 피눈물 나는 노동자의 투쟁과 삶의 이야기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노동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투쟁을 하고 있지만, 새로운 자극과 더 센 강도의 충격이 아니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우리들에게 노동계의 지난한 투쟁은 일상인 양 자연스럽게 묻혀버리고 이목을 끌지 못한 지가 오래인 것도 같다. '쪼끼' 아저씨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나 역시, 기사를 보게 되고 어쩌다 직접 접하게 되면 마음이 미어져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저 안타까움과 무력감을 느꼈을 뿐 어떻게 마음을 모으고 연대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지 못했다. 응원과 지지를 담은 마음으로 눈물을 삼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그들의 투쟁'에 대한 유일한 대응이었을 뿐이다.
이념보다 감성의 인간이라 자칭하는 저자의 주장은 사실 촌철살인의 예리함보다 동어반복의 우직함에 가깝다. 동어반복의 이유는 아마도 그의 글이 소재로 하고 있는 우리 사회 노동현장이 그만큼 한결같이 열악하고 처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읽다 보면 반문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동시대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딴 세상에 사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주치게 된다. 그것이 팔자라고 체념했던 가혹한 현실에서 자기의 몫을 찾고자 시작했던 작은 투쟁이 결국 인간의 이기심을 뛰어넘어 새로운 희망의 불씨로 피어나는 과정을, 저자는 세상의 현란함에 가려져 뒷전이 되었던 '그 곳에 있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로 매우 담담하게 전해준다. 책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노동운동의 부정적인 일면은 분명 사실일 것이고 그렇다면 전국을 돌며 1년에 수백 회 교육을 진행하는 저자만큼 그 부정성의 뼈저린 목격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억지 부리지 않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문제는 인정하되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을 보여주고 역사의 순리를 믿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그가 전하는 신랄한 감동의 이야기들은 노동운동에 대해 비정상적인(?) 친밀감과 짝사랑을 보이는 내게 소중한 해답을 주었다. 간혹 폭력적으로 비화되고 집단 이기주의로 치부되며 이해받지 못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비난하는 지인들에게, 고작 '오죽하면 저러겠냐' 정도의 반론밖에는 제기할 수 없었던 초라한 옹호자인 나로서는 좋은 밑천을 나눠받은 느낌이었다. 특히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된 노동조합의 투쟁과 직권중재 제도의 문제점 같은 부분은,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노동자들의 투쟁과 파업을 불온시하는 다수의 무지가 오히려 얼마나 폭력적이고 우매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고마운 내용이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에 대한 전망 역시 내게는 희망적이고 미더운 이야기였다.
본문에 실린 글들로도 저자가 어떤 사람일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 믿음이 가지만, 에필로그를 읽다 보면 그 여유로움과 희망의 이유를 더 깊이 실감하게 된다. 밑줄긋기에 통째로 옮기고 싶었지만, 혹여나 직접 책을 읽으려다 부가적인 정보가 주는 선입견으로 관둘 사람이 있을까 싶어 그만 뒀는데... 특히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말자'는 이야기는,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고 있는 저자가 그들에게 물 한 컵 떠다주는 정도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한 고백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소시민인 내게도 감히 공감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면, '부채감'이라는 말은 정말로 강력한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은 지금 무매력하고 무개성한 만만한 사람의 동의어와도 같이 인식되고 있지만, 그러고 보면 힘 없는 누군가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착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세상은 느리게나마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는 것인지 모른다.
들어가는 글에서 밝힌 이 책의 탄생기 역시 제목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고 또한 감동적이지만(이 책을 만나게 해 주신 후마니타스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소간의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대부분의 글이 시의성을 지닌 기고문인 듯한데, 글이 쓰여진 날짜와 발표된 지면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탓에, 나 같은 문외한은 글이 놓인 맥락 짐작이 어려운 부분들이 종종 있었다. 물론 본문 중 [ ] 안에 연도가 표시된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일관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본래 글을 그대로 살리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들어가는 말에 저자가 밝힌 대로 내림말과 높임말 정도는 하나로 통일을 해주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미 두툼한 분량이기는 하지만 노동문제에 이해가 별로 깊지 않은 보통 사람을 대상으로 한 책이니, 말미에 노동문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에 대한 주석 정도는 덧붙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교육 현장에서 졸음을 못 이겨 의자에서 떨어진 한 아줌마 조합원에게 저자가 건넨 우스개에 동료 노동자가 그녀의 소속 부서를 밝히고 덧붙였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회사에서 가장 힘든 곳입니다!" 순 억지가 될 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노동운동의 현장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든 곳입니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봤다. 주절주절 길게도 썼지만 거두절미;;;하고, 어쩌면 그래서 희망은 노동운동이 아닐까. 사실 지금 같은 세상에 여전히 노동운동을 희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저의를 의심받기 쉬운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미디어와 자본의 세련된 덧칠에 묻혀버린 노동의 세계, 범람하는 물신과 이미지의 발광에 그림자만 남아버린 고통 받는 사람들의 현실, 누구의 말인지도 모르고 너와 나의 입으로 서둘러 전해지는 경쟁력과 효율성의 논리. 그러한 당위적 현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을 좀 더 근본적인 시선으로 되돌아보고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좀 더 의심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자신과 사회를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 독서의 감동과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하종강님'이라고 깍듯이 쓰고 싶었는데... 글이 워낙 장황해서 그나마 경제성을 고려한답시고, 시건방지게 '저자'라는 말을 수십 번 썼음을 정말 마지막으로 밝힌다.
2006-07-16 21:0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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