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글을 쓰는 엄마와 두 딸이 열흘 간의 국도 여행을 떠났다. 철이 들락말락한 사춘기를 지나는 큰 딸 마로와 식물학자를 꿈꾸는 감수성 풍부한 어린이 한바라,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고 제목을 붙였지만 말미에 고백하듯 이 여행은 좀은 소심하고 걱정 많은 엄마의 도전이기도 하다. 집 앞 곤지암에서부터 이어진 3번 국도를 따라 문경, 상주, 거창, 산청, 진주를 지나 남해까지 여정은 이어진다. 그리고 나머지는 남편과 합류한 고흥에서부터 제주도와 마라도를 잇는 일주일 간의 가족여행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을 꿈꾸게 하는 많은 것들 중 가장 힘이 센 건 단연 길이 아닐까. 끝없이 이어진 길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아이다호'나 '길버트 그레이프' 혹은 '길' 같은 영화들이 먼저 떠오르고,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따라가다보면 '로드무비'라는 장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멈춰섰을 때는 이미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하는 정처없음의 길, 목적한 방향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길은 언제나 걸음을 불러오고 그 속에서 일상에 밀려 잊혀졌던 성찰을 이끌어낸다.
일찌감치 터전을 산속으로 옮겨 유난스럽지는 않은 생태적 일상을 실천하며 글을 써온 저자는, 평범한 독자가 받아들이기에 부담없는 부드러운 사유와 감성적이면서도 정갈한 문장으로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 중간중간 두 딸의 천진하고 비밀스런 기록이 함께 하고, 길지 않은 여행이 아이들에게 어떤 경험과 기억으로 남겨질런지 엿보는 재미도 녹녹하다. 사람을 꿈꾸게 하고 한편 주눅들게도 하는 길, 길 위의 인생이라는 낭만의 수사는 자신을 보호할 안전한 집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에게 펼쳐진 인생길 역시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크게 호흡을 가다듬고 고생스런 떠남을 감행한 세 모녀의 여행 속에도 인생길과 비슷한 여럿의 표정이 들어있다. 지인을 만나는 기쁨, 미처 몰랐던 땅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경이, 돌아보면 아찔한 난관의 순간, 피해갈 수 없는 험한 세상의 공포 그리고 함께 있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족의 소중함까지. 결국 돌아오기 위해 떠난 길에서 그들은 안온한 집안에서는 잊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끌어안고 마음의 키를 한 뼘쯤은 키운 것 같다. 내가 사는 집으로부터 뻗어나간 길에서 시작되는 여행, 나도 언젠가 그렇게 떠나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닿은 마라도의 노을을 만나는 날이 오면 좋겠다.
2006-08-19 11:09,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