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인용 구절과 작가의 이름과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고 적은 저자가 살아오는 동안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문장들일 텐데, 그 글을 쓴 이들에게도 이 책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많이 무겁고 충격적이기도 한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은 밀도와 온도에 유머까지 곁들여 써낸 문장가는 이전에 무척 독실한 독자였겠구나, 책 말고는 기댈 데 없는 절박한 시간들이 길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시 곱씹게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가족과 성장기, 학교와 직장 생활, 짝꿍과의 만남과 결혼 생활, 투병 등 온통 저자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연들로 가득한 책이다. "들어가며"를 집중해 읽었음에도 본문 첫 번째 글의 첫 문장을 마주하고는 나도 모르게 취재 내용인가 생각했는데, 간명한 선언처럼 시작된 개인사에 담긴 희로애락의 파고는 상당했다. 출판된 책이니 기록된 만큼은 언급해도 괜찮겠지만, 읽었답시고 인상적이었던 내용들을 내 말로 옮겨 적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느끼는 것 자체가 대상화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30대를 전후해 몇 년간 판이하게 다른 두 지역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며, 이 다른 세계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나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서로를 마주칠 기회가 있을까 생각하면 새삼스럽고 막막할 때가 있었다. 몇 달 전 [쇳밥일지]를 읽으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 시절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가난과 결핍은 시기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과거 혹은 옛날의 어떤 상태로 간주하는 무신경함. 세계는 당연히 늘 수많은 다름들로 구성되는데, 내가 둘러싸인 물리적 조건과 작은 범위의 경험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무척이나 두터운 인식의 벽인 것 같다.
저자의 많은 인용구들을 읽으면서 글이란, 책이란 참 신기한 것이란 사실과 다시 만났다. 무수히 쏟아져나오는 책들 중 어떤 구절은 누군가의 마음에 각인되고 한 시절 생의 무게를 나눠지는 거대한 공감의 우주가 되기도 하는, 잊고 지냈던 마법을 기억해낸 기분. 어쩔 줄 모르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던 어린 날의 책들 그리고 서울 떠날 결심을 굳히고 딴에는 용기와 위로를 되새기며 자주 읽었던 백석 시인의 "선우사"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어떤 책도 읽기만 하면 지금의 나를 비춰주고 무언가를 건네주는데, 갖은 자극으로 산만해진 나태한 마음과 정신이 무의식 중에 그런 만남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단기간의 요란한 추천과 홍보에 이어 무화되어 버리는 듯한 신간에 심드렁한 마음이 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호기심의 상대가 아닌 이의 개인적인 에세이들을, 단기간의 집중적인 홍보에 혹해 샀다가 읽으며 피로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작가의 계정과 신간 소식을 본 기억이 있는데 트위터에 잘 들어가지도 않게 되면서, 사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출간 직후의 소란스러움은 출판사로서는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온라인에서 두어 번만 마주쳐도 시끄러운 거리감을 느끼는 내게는 적정한 시기의 독서였던 것 같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떠올리며 딴에는 용기와 위로를 되새기던 머지 않은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던 지난 시절의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각인되고 어떤 시기에는 생의 무게를 나눠지기도 하는 많은 인용구들이 처음이면 처음인 대로, 이전에 책에서 읽었을 텐데도 새로우면 새로운 대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누구나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이 책은 더욱 '살아가는' 중인 당사자만이 직접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든 길을 만드는 사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글이 주는 힘을 오랜만에 느꼈다.
장일호
2022.12.4.처음찍음 2023.2.6.네번찍음, 도서출판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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