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처음으로 밟아봤던 전라도땅, 그 중에서도 광주는 현실 속에서 생동하는 도시가 아닌 십 여년 전 역사의 아픔을 여전히 머금고 있는 비극의 땅이라는 숙연함과 함께 일종의 성지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굳이 망월동의 쓸쓸한 비감만이 아니라, 인파의 활기로 넘치는 도청앞이며 양동 시장의 거리도 내 눈에는 머리 속에 박힌 흑백 영상의 강렬한 이미지가 살아나 괜스레 가슴을 짠하게 했었다. 그리고 지난 3월 하순의 어느 토요일 저녁, 나는 다시 광주를 향하고 있었다.
온 나라의 온갖 광장마다 사람들이 모여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는 초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하지만 그저 내 좋은 것을 찾아 광주까지의 먼 길을 홀로 가는 내 마음은 많이 들떠있었다. 무등산 증심사, 이름모를 스님과 목사님이 한 달에 한 번 동짓달이 뜨는 밤에 작은 음악회를 열고 계시다 했고 나는 그 음악회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시끄럽고 경박스런 세상살이를 잠시나마 떠나고 싶은 마음에 작은 용기를 낸 걸음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외모에 작은 체구를 지닌, 임의진 님을 그 곳에서 처음 뵈었다. 음악회에서 노래하신다는 두 분의 노래가 너무나 그립고 소중해서 기쁜 마음에 달려간 그 곳에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 임의진 님을 만난 기분이 그랬다. 해 떨어진 산사의 앞마당에는 초봄의 햇살 간데없이 덜덜 떨리는 추위만이 가득했고, 주말의 산행을 정리하는 분주한 가족들과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산만했다.
하지만 사랑으로 가득찬 스님과 목사님 친구가 선사한 작은 음악회는, 세상 사람 다 들으라는 듯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구원의 목소리가 눈살을 찌푸리도록 난무하는 현실에서 참으로 눈물나도록 아름답고 감사한 것이었다. 위중한 병에 고통받는 친구 스님의 쾌유를 함께 빌어달라는, 자연과 생명을 노래하는 친구 노래꾼들의 노래를 상찬하는, 지금은 이곳에 있지만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라크의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모으자는 님의 말씀과 공연을 떨리는 몸과 마음으로 지켜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바닥으로부터 차오는 깨끗한 기쁨을 맛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그분의 홈페이지를 구경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기다리고, 마침내 손에 쥔 두 권의 책을 꼬박 밤을 새우며 다 읽고나서... 덥수룩한 수염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마치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 보였던 그분에게서 풍겨오던 아름다운 향기가 다름아닌 흙과 사람과 사랑의 그것임을 마음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기도 힘든 토종 전라도 사투리와 새삼스레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우리말이 가득한 글에서는 남녘땅의 작은 교회를 지키며 살아가는 가난한 목사의 삶과 꿈을 볼 수 있었고,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의 높은 벽과 폐단을 맨몸으로 거부하고 스스로 자유로와진 한 인간의 넘치는 사랑이 가득 묻어났다.
때로 미소가 스미고 때로 가벼운 한숨이 배어나오는 그와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이 더함도 덜함도 없이 따뜻한 문장에 담겨있는 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나도 그 마을의 이웃인 양 머리 속에 산과 들이 펼쳐진다. 가장 어려운 길을 가장 쉬운 길인 듯 훠이훠이 어깨춤 추며 가는 임의진 님의 글을 이제야 만난 아쉬움보다는,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픈 벅찬 마음으로 오랜만에 맞은 기쁜 새벽이었다.
2003-04-14 17:05,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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