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적잖은 사람들의 숨은 감성을 자극하고 일깨우던 잡지, 주변에 자칭 페이퍼족이라 이름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만큼 조용한 열광을 받았던 잡지가 아직도 나오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 관심있는 사람의 인터뷰가 실릴 때나 구해서 보곤 했을 뿐, 나는 별로 그에 호응하는 측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책을 만든 황경신의 글에서는 묘한 흡인력과 진정성이 묻어나서 그녀의 글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모두에게 해피엔딩, 제목이 주는 느낌이 참으로 밝고 화사하다. 해피엔딩이라는 말이 어렸을 적 읽은 동화의 권선징악과 꼭같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고, 사랑이나 연애에서의 그것이 반드시 온전한 행복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책을 쓴 그녀 역시 해피엔딩이라는 경쾌한 단어가 말의 뉘앙스만큼 환하고 기쁘기만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담담하게 물을 많이 머금은 수채화같은 느낌의 이야기 속에는,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과 사랑에 대한 아련하지만 슬픈 통찰이 담겨있는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은 모두 같은 이유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하나같이 속으로 앓이하고 아픔을 감내하며 시간을 견뎌나간다. 연애 소설이라지만 싱그럽고 아름다운 연애의 알싸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삼각관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우아하고 점잖아서 싱겁기까지 하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상대를 원하고 사랑을 원하지만, 속으로만 속으로만 파고 들어가 스스로의 열망을 거세하고 식혀나가는 일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가슴 속의 바람이 표현되는 순간은, 그토록 원하던 관계의 성립이나 교감이 아니라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마지막이 되어버리리라는 인어공주적 사랑의 원형이 이들 속에는 어떤 공포로 내재되어 있는 것만 같다.
엇갈린 사랑이 지나간 후에야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온다. 줄거리에 몰입해서 읽다보면 마지막장에서 등장하는 화가의 존재는 의아스럽고 돌출적이다. 묘사된 인물의 디테일이 지닌 클리셰와 과거 서해에서 만난 비에 대한 회상이라는 에피소드의 억지스러움은 순간 당혹감을 느끼게도 했고 마무리를 위한 무리수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너무나 허접한 그런 설정에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상처를 지닌 우리들의 모습이 또한 거기에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 화가는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지만, 목숨을 건 젊은 날의 사랑 혹은 그 시기를 통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볼 만한 가벼워짐을 선사하는 인물이다. 그 긴 시간의 고통과 주저와 갈망이 무화(?)되고 결국 예정된 일인 듯이 그에게로 가는 그녀의 그 다음, 해피엔딩일까. 결국 해피엔딩이랑 무겁게 나를 옭아매고 있는 그 무엇인가로부터 가벼워지는 것일까?
2003-03-03 15:5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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