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7. 24. 02:30

 

예전에 다큐멘터리 [보테로]를 인상 깊게 보고 그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었다. 마약 카르텔의 중심에서 환골탈태했다는 그의 고향 메데진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간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마약왕 에스코바르'는 이름 정도나 들어봤을 뿐이지만 "마약의 수도는 어떻게 전 세계 도시의 롤모델이 되었나?"라는 부제가 붙은 걸 보면 무지한 내가 느끼는 그의 영향력과 위상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인 것 같았다. 꽤 기대하며 선택한 것에 비하면, 책은 보고서 형식의 무미건조한 서술로 채워져서 별로 재미가 없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해 요소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터라 때로 불쾌했고 결국엔 씁쓸한 느낌이었다. 하여 250쪽밖에 안 되는 책을 지루함과 불퉁한 마음을 다스려가며 끝까지 읽어내느라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려나-

 

메데진은 보고타에 이어 콜롬비아에서 두 번째 큰 도시로, 안데스 산맥 중부 아부라 계곡에 들어선 안티오키아주의 주도라고 한다. 2020년 기준 약 257만 명이 살고 있고 아부라 계곡 대도시권으로 확장하면 인구는 약 373만 명. 커피 등 농업 생산 중심이었던 도시의 주력 산업이 20세기 중반 이후 제조업으로 바뀌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해 대도시화되었고 콜롬비아 최초의 메트로폴리탄 건설 계획인 '메데진 마스터플랜(MMP)'를 통한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급격한 인구 폭발과 비공식 정착지의 무분별한 확장을 행정력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도시 인프라 부족으로 아부라 계곡 인근의 자연재해가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고, 특히 1980년대 전후부터는 산업 기반이 붕괴한 도시에 빈곤과 실업, 폭력이 만연하면서 지역 자체가 마약 카르텔과 반군의 온상이 되었다고.

 

그 시기 코카인 거래 시장을 장악하고 전 세계적인 마약왕으로 등극한 에스코바르는 메데진에서 복지와 자선 사업을 펼치고 가톨릭교회 재정에도 기여하며 '빈민들의 로빈 후드'라는 별명을 얻고 1982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범죄 사실을 폭로하고 비난한 법무부장관을 암살하고 테러를 일삼던 중 정부에 부채 탕감과 사면을 거래하다 실패하자 스스로 수감되었고, 이후 탈주해 은신하다가 1993년 최후를 맞은 곳 역시 메데진이었다. 마약왕에서 정치인으로, 희대의 대형 범죄를 일으키고 극적인 최후를 맞은 안티 히어로로서 에스코바르의 존재감은 사후에도 건재했다.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낭만적으로 미화되기도 하고, 메데진 곳곳에 남은 그의 흔적은 다크투어리즘으로 관광객을 끄는 자원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에스코바르가 활동할 당시까지도 주민들에게 마약 밀매는 범죄라기보다 사업의 하나로 여겨졌다고 하는데, 무정부 상태의 빈곤 속에서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된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2000년대 이후 시작된 메데진의 변화를 이끈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전문가 들이었다. 책에서 첫손에 꼽는 이들은 수학자 출신으로 2004년부터 시장과 안티오키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2022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1차 투표에서 4.18% 득표로 8인의 후보 중 4위, 궁금해서 찾아봄) 세르히오 파하르도와 건축가 알레한드로 에체베리. 파하르도는 사회적 불평등과 폭력의 해결책을 개인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즉, 공공 장소에서 찾고 도시의 물리적 구조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도시가 가장 가난한 지역사회에 빚진 사회적 부채를 해소할 방법으로 '교육'을 내세우고"(45p) 재임 시기 투자 예산의 52%를 교육 관련 프로그램에 할당했고, 새로운 인프라와 건축 사업을 교육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이 내용은 '통합 도시 프로젝트'를 위한 시 정부의 개입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유사한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기억하고 싶은 문구여서 옮겨둔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도시의 '사회적 부채'인 사회적 불평등"(132p)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고 주민의 존엄성 회복을 꾀하는 구상의 실행을 담당한 건축가들 중 대표격인 알레한드로 에체베리는 파하르도가 시정의 핵심 철학으로 삼은 '사회적 도시계획' 전략의 창안자였다. 그는 "도시의 변화가 사람과 함께 그리고 사람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49p)하고, "존엄성과 자부심의 문제는 개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도시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최고의 품질을 지닌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문제죠."라고 말하는 건축가다. 저자는 이에 더해 메데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로 "지역 사회에 자극을 줘 주변 지역을 되살리고 생기가 돌게 하는"(53p) '도시침술'을 강조한다. 메데진의 '사회적 도시계획'과 도시개발 프로젝트는 이후 시정 권력 이동에 따른 여러 가지 부침을 겪지만, 메데진은 201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도시 계획과 정책 분야에서 혁신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셀럽시티'로서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메데진의 변화를 교통, 주거, 교육, 공공장소, 문화, 지식, 테크놀로지 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전체적으로 낙후하고 불균등 발전을 보이는 도시의 교통 정책에서 우선순위는 걷기, 자전거, 대중교통, 택시, 자가용 순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세계 최초로 메트로케이블이라 불리는 케이블카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만든 것인데, 2004년 K라인 개통을 시작으로 현재 6개 노선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계곡에 위치한 도시 지형과 고지대에 밀집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이동성을 고려한 케이블카의 대중교통화는, 빈민가 지역의 낙인 효과를 줄이고 소득을 창출하며 지역 중심부와의 연결성을 높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수용 인원의 제한성과 러시아워의 과밀 등 한계도 지적되지만, 수력 발전을 이용한 전기를 활용하고 인근 건물들의 차량 접근을 제한해 오염을 줄인 친환경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 애초 구상 단계에서는 정치적 냉소와 위험을 감수할 보험 계약자 확보의 어려움에 직면했던 프로젝트가 도시의 변화를 이끌며 꾸준히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메데진 대중교통의 인프라는 메트로, 가선 트램, 트란비아라 불리는 노면전차, 전기버스, 간선급행버스, 메트로케이블 등 다양한 수단의 유기적 연결로 '통합 이동성 네트워크'를 구성해 생태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에 '보편적 기본교통' 시스템으로서의 공공 자전거 엔시클라 그리고 산자락 마을들이 분포한 산하비에르 지역에 2011년 설치된 6개의 야외형 에스컬레이터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상징적인 교통수단으로 거론된다. 교통 혼잡과 대기오염이 심각한 도시 중심부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차 없는 날', 부제 운영 시스템 '피코 이 플리카', 정기적으로 도로를 폐쇄해 임시적으로 주민들의 신체 활동 공간으로 전용하는 '시클로비아' 등 다양한 정책들이 활용되고 있고, 장기적으로 2030년까지 자전거가 대도시권 전체 교통량의 10%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도 설정하고 있다고 한다. 문외한 입장에서도 획기적으로 느껴지는 정책들인데, 무엇보다 대도시의 정책 입안이 신속성과 효율성이 아닌 생태와 취약자 친화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메데진의 변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공 공간은 주민의 교육과 만남, 문화예술과 여가와 체육 활동 등을 위한 다양한 공간이다. 도서관 공원, 교육 공원, 문화센터, 맨발의 공원, 생태공원, 연결형 생활공원(우바) 등으로 소개되는 곳들 중에는 과거 감옥이나 갱단의 거점 등 부정적인 역사를 품은 건물을 개조하거나 그 부지에 들어선 경우도 있어 공간의 의미에 포용성을 더한다. 산크리스토발 지역 서쪽 외곽에 위치해있다는 페르난도 보테로 도서관 공원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더 갔는데, 브로셔 수준의 짧은 설명이 아쉬웠다. 저자는 최근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처음 제창한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 거주자는 국가 단위의 멤버십인 국적에 기초한 권리와 무관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125p)는 말을 인용하는데, 여전히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또다른 권리의 이름으로 배척되고 호도되는 현실과 '새롭게 주목받는' 권리 목록과의 거리와 긴장에 대해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이 책이 관심이 간 이유는 보테로 때문이었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지 않다. 다큐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서술되어 있어 기념으로(?) 옮겨보자면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의 청동 조각상 <새>를 둘러싼 일화도 흥미롭다. 1995년 6월 야외 콘서트 도중 산안토니오 광장의 조각상 아래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23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좌파 게릴라 그룹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이 평화 협상에 응하지 않던 당시 국방장관 페르난도 보테로 제아Fernando Botero Zea를 응징하는 대신 그의 아버지인 보테로의 작품을 파괴하면서 벌어진 테러였다. 보테로는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메데진 시민들이 이 사건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품을 파괴된 채로 보존해 광장에 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2000년, 같은 형태의 작품을 다시 제작해 시에 기증했다. 오늘날 산안토니오 광장에는 테러 희생자 명단이 바닥에 새겨져 있고, 두 마리의 청동 새가 <평화의 새들>이란 이름으로 나란히 서 있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그림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런 예술가들의 힘과 열정 덕분에 메데진이 오늘날 마약과 폭력, 살인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151p)

 

메데진의 변화에는 정치와 행정, 전문가들의 역할 못지 않게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인 지역에서 살아가는 예술가와 주민들의 기여 역시 컸다. 일상적인 폭력에 지역의 아티스트들은 예술을 통해 저항했고, 메데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의 10% 이상이 발생하는 곳이었던 산하비에르 지역에서는 야외형 에스컬레이터 설치로 물리적 환경이 개선되기 이전부터 지역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사회를 바꾸기 위한 벽화 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힙합 활동가들은 빈민가의 청소년들에게 랩과 춤, 그래피티를 가르치는 비폭력 저항의 메신저였는데, 그러한 파급효과 때문인지 2009년 이후 산하비에르 지역의 힙합 아티스트 10명이 갱단에 살해되는 비극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메데진에는 5개의 힙합 학교가 있고, 그중 아랑훼즈 지역에서 콜롬비아의 가장 유명한 그룹 중 하나인 크루 펠리그로소스가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 600명 중 40%가 십대 소녀들이라고 한다. 힙합 학교가 운영되면서 이 지역의 살인율이 80%나 감소했다는 사실도, '삶을 향한 힙합'이라는 모토로 교육과 평화를 위해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존재도 놀랍고 감동적이다. "지역 주민들은 우리를 히트맨(암살자), 마약 중독자, 방랑자의 동의어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길을 건넙니다. 거리를 건너와 우리를 맞이하고 우리를 이곳의 변화에 도움이 되는 주체로 생각합니다."(164p) 당연하게, 하루아침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니 더욱.

 

이외에도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볼거리 중 하나인 메데진 꽃 축제와 여러 이벤트, 대안 노벨상이라 불린다는 '바른 생활상The Right Livelihood Award'("세계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비전과 모범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용감한 사람들과 조직을 존중하고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 175p)을 수상한 40년 이상 지속된 '메데진 국제 시 축제' 그리고 기술과 산업을 선도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혁신지구와 교육센터 등이 메데진의 변화를 이끄는 요소들로 소개된다. 현재진행형 이슈 중 하나인 팬데믹과 기후위기 관련한 도시 계획 및 현황, 보고타에서 시작되어 메데진에서도 정책화한 시클로비아 운영에 대한 설명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에필로그에서는 도시학자의 입장에서 "메데진의 그늘과 남은 과제"를 살피며 현장의 목소리를 세세히 듣지 못한 한계와 더불어, 본문에서도 한 차례 언급했던 2019년 세계시장포럼 참석자들과 산하비에르에 방문했을 때 1인 시위자가 들고 있던 팻말 속 "시장은 현실을 보여달라" "현실을 숨기지 말라" "집도, 먹을 것도, 직장도 없다" "시장은 이런 사람들이 오면 우리를 숨겨두려고만 한다"는 내용을 환기한다.

 

몰랐던 내용이 많았지만, 그 어떤 정책에도 사각지대 그리고 탁상과 현장의 괴리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며 읽었다. 두어 차례의 방문과 정부 및 관계기관이 발간한 보고서와 홈페이지의 내용 등이 주요 자료였을 테고, 그러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메데진에 수여된 각종 도시와 혁신 관련 상과 헌사 들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로 기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 프로젝트들에 대한 많은 설명에서 '주민 참여' 항목이 강조되지만 '일반 주민'의 목소리는 별로 접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읽으면서도 들었는데,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보고서에 가까운 책이었으니 그러려니. 전체적으로는 기술과 자본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이러한 결정과 실행이 가능한 정치와 행정이 어느 정도는 지속가능한 동시대의 시공간을 확인하는 신기함이 가장 컸다. 실질적 무정부 상태를 경험한 적 없는 시민으로서, 살인과 폭력이 횡행하며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지역의 주민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일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서는 이들이 꾸준히 있고 잠정적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던 것 같다.

 

그러나 머리말에서부터 언급되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중간중간 거듭되다 후반부에는 사진에까지 등장해 불쾌함으로 책을 덧씌운 전 서울시장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도시학자로서 저자의 활동 이력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은 알겠으나 책을 펼치자마자 헌사의 대상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건 무방비상태에서의 충격이었다.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치적이나 개인적 친분을 감안하더라도, 불특정다수의 독자들을 전제한다면 이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책을 다 읽은 후 실제로 불쾌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책 소개 하단에 간단히 안내 문구라도 넣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저자나 출판사의 성범죄에 대한 민감성 수준에 실망스러웠는데 혹시 자살한 그의 성범죄 사실을 부정하고 생전 공적인 행보를 부각해 명예 회복을 꾀하는 측이라면 더욱 문제적이라고 느꼈다. 한편, 성범죄와 같은 파렴치를 저지른 유력 인물의 영향력 혹은 추종의 자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난감하고도 어려운 자문도 생겨났고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그의 이름과 그를 향한 존경과 심지어 사진을 대면했을 때의 당혹감과 불쾌감과 별개로, 그러한 존재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무시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물론 이는 나로서는 매우 사적인 수용의 문제이지만,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여전히 지난한 투쟁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정리하며 짚어보니 책은 나쁘지 않았지만, 사소한 것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걸 강력하게 확인했다.

 


박용남
2023.1.13초판1쇄인쇄 1.20발행,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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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