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같은 자명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이른 새벽, 성경 구절까지 동원해 스스로를 독려하며 어렵사리 몸을 일으키는 도러시는 잉글랜드 동부 서퍽주 나이프 힐에 있는 성 애설스탠 교회의 사제인 찰스 헤어 신부의 외동딸이다. 스물여덟 살의 도러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부속사제를 둘 수 없는 가난한 교회에서, 예배 집전을 제외한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천 명가량의 주민이 사는 마을은 남북으로 농경 지역과 사탕무 정제소가 들어선 공장 지역으로 나뉘고, 이들의 사교 생활은 '나이프 힐 보수주의 클럽'과 '디 올드 티 숍'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교회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 클럽과도 한창 진행 중인 보궐선거와도 무관한 듯 대다수 주민들과 거리를 둔 채 존재한다.
자신의 가난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으로 여겨 언제나 심기가 불편한 신부는 '하층계급'도 '하급 귀족'도 티 숍에 모이는 '커피 여단'도 혐오하고 세간에 유행하는 종교적 자유주의 풍조인 앵글로가톨릭주의를 '로마 열병'이라 부르며 폄훼하는 인물이다. 독선과 오만으로 교구와 주민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는 그가 부임한 이후 신도들은 부자들을 필두로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맹목적인 주식 투자를 지속하면서, 매년 꾸준히 재산을 까먹고 있는 신부는 늘 부족한 생활비에 허덕이는 딸의 곤욕을 모른 체하고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입맛을 고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덕분에 수시로 날아오는 동네 가게의 외상값 독촉장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고민과 수치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도러시다.
그럼에도 도러시는 신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고 언제나 경건함을 유지하며 묵묵히 기도와 찬양, 주어진 직분(전멸에 이른 '결혼을 위한 교류회'와 '연소자 금주 동맹', 그나마 굴러가는 '어머니 연합' 간사 그리고 걸스카우트의 전신인 걸가이드의 대장 역할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일)에 충실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신부의 면도물을 데우며 시작하는 하루, 전날 메모한 쪽지에는 7시 성찬례 준비부터 신도 방문, 교회 시설 관리와 신부의 세 끼 식사에 이르는 다양한 할 일들이 적혀 있다. 괴팍한 신부 탓에 어려워진 교회 운영을 위한 수익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도 오롯이 그의 몫, 다년간 기부금 모금을 위한 가장 행렬과 연극을 준비하며 도러시는 갖은 재봉질은 물론 갈색 포장지와 아교로 그럴듯해 보이는 갑옷이며 군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한 금손이 되었다. 따분하고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수많은 할 일에 떠밀리듯 숨가쁜 생활 속에서 가끔 불만이 일 때면 도러시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간혹 용납할 수 없는 불경스러운 마음이 느껴질 때면 핀으로 팔을 찌르며 참회하는데, 이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다.
자칭 세 사생아의 아버지이자 화가인 워버턴 씨는 그런 도러시의 생활에 기이한 환기창 같은 이웃이다. 경건하고 신실한 도러시와는 극단의 성향과 생활을 영위하는 그는 2년 전 이웃이 되어 동거하던 가정부이자 첩이 갑자기 떠난 후 마을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던 마흔여덟 살의 한량이다. 문란하고 부도덕한 그의 습관에 가까운 성추행이 도러시에게도 있었지만, 다양한 책과 좋은 차와 함께하는 대화는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일종의 연민과 이해"를 선사했기에 유랑하듯 사는 그가 나이프 힐에 올 때마다 교류는 이어졌다. 도러시는 둘만 있게 되는 상황과 추문을 퍼뜨리는 마을의 험담꾼인 또 다른 이웃 셈프릴 부인을 동시에 경계하면서 그와 대화를 나누며 잠시나마 다른 세상을 만났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한창인 거리에서, 거액의 외상값이 쌓인 카길스 정육점 앞을 지날 일에 잔뜩 주눅들어 있던 도러시 앞에 오랜만에 워버턴 씨가 나타난다.
저녁에 작가가 방문한다는 거짓으로 초대에 성공한 그는 도러시의 답답한 삶을 도발하는 대화와 더불어 오랜만의 성추행과 강제 뺨 키스에도 성공한다. 워버턴 씨의 성추행으로 도러시의 뇌리에는 5년 전의 사랑, 자신에게 청혼했으나 폐렴으로 죽은 밀버러 성 베데킨트 교회의 보좌신부 프랜시스 문 그리고 남모르는 불치병인 자신의 성적 냉담증과 아홉 살에 목격한 부모 사이의 무시무시한 광경 등이 떠오른다. 집 앞까지 따라온 워버턴 씨를 물리치고 돌아온 온실에서 아교 냄비를 끓여 가장 행렬에 쓰일 군화를 만들며 팔을 꼬집어 잠을 좆는 도러시. 여기까지가 6장으로 구성된 제1부의 내용인데, 오믈렛을 만들 때조차 모양이 흩트러지지 않기를 짧게 기도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찰라를 의식할 때면 "이교도적인 황홀경"에 빠졌다는 자책에 자연숭배를 반성하며 "장미 가시로 팔을 세 번 찌르며 삼위일체의 삼위격"을 되새기는, 신앙에 잠식된 도러시의 삶은 제2부에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2부는 낯선 공간에서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깬 도러시의 혼미한 시선에서 시작된다. 영문을 알 수 없이 런던의 뉴 켄트 로드에 있게 된 도러시는 기억을 잃었다. 도러시를 매춘부나 부랑아쯤으로 여기고 다가온 노비와 플로와 찰리는 그에게 약간의 돈이 있다는 걸 확인한 후 켄트주에 가서 함께 홉을 딸 것을 제안한다. 판단 능력을 잃은 도러시는 일행과 함께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고 노숙하며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홉 밭으로 향한다. 플로와 찰리는 중간에 사라졌지만 거리 생활에 필요한 여러 재주를 가진 노비와 함께 도러시는 마침내 일을 얻는다. 집시들과 다양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홉 농장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되고 손에 피가 흘러 굳어야만 그나마 수월해지는 노동은 험하지만, 마흔 명이 한 팀이 된 홉 밭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일이 끝난 밤 캠핑이라도 온 듯 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는 기묘한 공동체적 온기가 흐른다. 의식이 정지된 듯 고되지만 무감히 견딜 만한 생활은, 농장 사람들 사이에서 도러시와 연인 관계로 여겨졌던 노비가 닭을 훔치는 데 앞장선 대가로 잡혀가고 홀로 남겨진 후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면서 마감된다.
엘런 밀버러가 된 도러시가 거리를 유랑하고 홉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삼류잡지인 <피핀스 위클리>에는 사라진 '신부의 딸'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가 연일 실렸다. 셈프릴 부인의 악의적인 인터뷰를 그대로 받아적고 근거 없는 추측을 덧붙인 기사 안에서 도러시는 유부남과 눈이 맞아 사제관을 떠난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어 파리며 빈 어딘가에서 목격되고 있었다. 홀연히 돌아온 기억과 우연히 확인한 기사를 통해 현실의 일부를 깨달은 도러시는 자신의 진실과 함께 나이프 힐로 돌아가기 위한 교통비를 청하는 편지를 신부에서 거듭 보내지만 답을 받지 못한다. "지난 3주 동안의 몽환적인 무심함"이 부서진 후 꿈에서 깨어난 듯 도러시의 의식은 선명해졌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기도를 잊은 채 자신의 생존에 골몰한다. 홉 따기 시즌이 끝난 후 농장에서 선의를 보여준 털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온 도러시는 그간의 해묵은 때를 벗겨내고 얼마 안 되는 전재산을 털어 옷가지를 장만하고 매춘부들이 기거하는 메리 여인숙에 여정을 푼다. 절박한 마음으로 신부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을 채 당도하기 전에, 돈이 떨어진 도러시는 거리로 나온다.
메리 여인숙에 머물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공공도서관의 신문 광고란을 찾고 적잖은 지원서를 보내지만 "위험한 독신녀"인 도러시를 받아주는 곳은 없다. 교양 있는 말투는 가정교사나 하인을 구하는 주부들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했고 달리 선택지가 없는 도러시는 "밑바닥 세계에 가까워질수록 덜 끔찍해" 보인다고 느끼며 제3부에서,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살을 파고드는 밤의 추위를 견디며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파문된 신부, 남편에게 쫓겨난 부인, 중산층이었다가 전락한 부인, '유대인 놈', 변태적인 노래만 반복하는 남자 등 불결하고 추잡한 열세 명의 무리에 끼어 있는 도러시. 각자의 불만과 욕지거리와 저주와 허세를 담은 독백들은 당직 경찰관이 나타날 때 잠시 멎을 뿐이지만, 모두가 괴로운 뼈까지 시린 새벽이 되자 이들은 벤치 위에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어 함께 견딘다. 그리고 새벽 5시에 열리는, 테이블당 차 한 잔이면 잠시 몸을 녹이고 눈을 붙일 수 있는 카페로 몰려가 노곤한 몸을 잠시 쉰다.
기억을 잃었던 홉 농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도러시는 거리 생활에 금세 적응한다. "희귀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기묘한 종족의 일원이 되어" 일을 구할 때와는 달리 도움이 되는 교양 있는 말투로 푼돈을 구걸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한다. 그렇게 열흘째가 되는 날 구걸 금지법을 정기적으로 집행하는 경찰에 연행된 덕에 간만에 긴 잠을 자고 즉결 재판소를 나온 아침, 뜻밖의 상황이 도러시를 기다리고 있다. 다섯 번의 편지에도 무답이었던 아버지가 실은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에서 절대 잊히지 않을" 아침 식사를 스스로 준비하는 일을 감당하며 신부는 단지 그것만은 아닌 이유로, 15년간 왕래가 없었던 사촌 토머스 경에게 연락을 취해 도러시를 찾아 런던의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는 마지막 편지의 답장과 동봉한 돈은 메리 여인숙에서 나온 도러시와 어긋났지만, 토머스 경의 집사 블리스는 도러시를 제때 찾아냈다.
제4부에서 도러시의 삶은 또 한 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토머스 경의 변호사를 통해 런던에서 멀지 않은 사우스브리지 여학교의 보조교사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링우드 하우스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내건 그곳은 당시 현금 수익인 학비를 겨냥해 몇 가지의 집기를 구비하고 난립한 작은 사립학교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교육보다는 수업료를 내는 학부모들의 만족을 위해 매진하는 4류 사립학교였다. 교장인 크리비 부인은 수업료 납부율에 따른 학생 차별을 당연히 여기는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로, 배움이 짧은 학부모들에 대한 보여주기식 습자와 단순한 프랑스어 문장 암기만을 중요시했다. 무지하고 의욕 없는 아이들과 낡고 뒤떨어진 교재와 학습 과정, 보조교사에게 거의 모든 수업을 맡기면서도 하인처럼 부리는 교장 사이에서도 도러시는 나름의 혁신을 꾀하면서 교사직을 "마음과 영혼을 바칠 만한 과업"이라 여기며 몰두한다.
새로 부임한 교사가 마음에 들어 푼돈 모아 산 꽃다발을 선물하기도 한 상냥한 아이들을 위한 도러시의 노력은 그 자신도 일깨우고, 교실은 잠시나마 배움의 의지와 생동감으로 넘친다. 그러나 교재 중 하나로 삼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자궁'이라는 결정적 단어가 등장한 직후, 학부모들은 '실제적인' 교육을 등한시한 채 불필요하고 품위 없는 문학 교육을 일삼는 도러시를 정면으로 비난한다. 학교로 몰려온 학부모 대표들의 불만 표출과 그들 앞에서의 교장의 꾸중, 그들이 돌아간 뒤에도 이어진 질책 등을 단지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아낸 도러시의 일상은 다시 회색빛으로 물든다. 크리비 부인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교육으로 돌아간 결과, 잠시나마 제대로 된 수업에 앎의 즐거움을 경험했던 아이들의 배신감과 실망은 더욱 커졌다. 냉담해진 아이들의 수업 방해와 저항은 갈수록 심해졌고 부임 초기 티가 나지 않게 귀를 비틀라는 교장의 체벌팁에 충격 받았던 도러시는, 교실의 집단적인 조롱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소녀의 귀싸대기를 때리기에 이른다.
방학과 크리스마스 즈음 워버턴 씨와 신부의 편지가 당도하지만 아직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방학의 밥을 축내는 것을 아까워하는 크리비 부인을 피해 공공 도서관이며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며 도러시는 새삼 텅빈 외로움을 느낀다. "큰 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부산스러움 때문에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을 할 수 있고, 시골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하지만 사우스브리지 같은 곳에서는 가족과 자기 집이 없으면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채 인생의 절반을 보낼 수도 있다."(373쪽) 고립감과 권태감에 지친 도러시에게는 아무런 희망 없는 봄학기의 시작도 기쁜 일로 다가오고, 아이들을 제압한 비루한 교사가 된 도러시에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온전한 허수아비를 되찾은 크리비 부인만이 그런 도러시가 마음에 드는 듯 몇 달 간 넘볼 수 없었던 식탁 위의 마멀레이드를 허락하고 "다음 학기"를 자주 언급하지만, 실소를 부르는 유치한 변화 역시 계획적 해고를 앞둔 연막이었다.
학생의 머릿수와 학비를 담보로 해적질이 난무하던 하류 사립학교의 생리를 알 수 없었던 도러시는 얼마 후인 학기가 끝나는 날 가차없이 해고되었다. 불가항력을 인지하고 짐을 싸 링우드 하우스를 나선 도러시 앞에, "밀-버러"를 찾는 소년이 나타나 전보를 전달한다. 셈프릴 부인의 명예훼손 소송 피소로 도러시에 대한 오해와 추문이 거짓으로 밝혀졌다며 도러시를 데리러 오겠다는 워버턴 씨의 전갈, 곧 나타난 워버턴 씨와 함께 도러시는 어리둥절하게 택시에 오른다. 런던에 도착해 나이프 힐로 향하는 기차에서 도러시는 "모든 진정한 사건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진부한 말"을 되새기며 신앙을 잃은 현실과 "인생을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한다. 워버턴 씨는 난데없는 기억 상실이 억압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신부의 딸'로 돌아가 독신으로 늙어갈 미래를 주워섬기며 청혼하고, 그가 그리는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에 잠시나마 수긍하던 도러시는 그의 스킨십 시도에 주술에서 벗어나듯 정신을 차린다.
제5부의 2장,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제1부와 다름없는 도러시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독한 감기에 걸려 긴 요양을 떠났다는 공식 명분처럼, 핼쓱해져 돌아온 도러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의 생활로 돌아왔다. 최면에 걸린 듯 신앙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바쁘게 수행하던 갖가지 일들은 그대로다. 신앙을 잃은 채 이전과 다름없는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도러시는 삶의 본질에 대해 묵상한다. "궁극적인 목적이 없는 삶의 구석구석에는 우울함과 쓸쓸함이 도사리고 있다."(423쪽)는 뒤표지의 발문은 스산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절대자의 계시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각자가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깨달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앙을 잃었지만 신앙의 욕구마저 사라지지는 않은 도러시는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녀는 경건한 마음으로 몰두"하며 자신의 일과 함께 다시 살아간다.
1935년 3월에 출간된 두 번째 소설인 [신부의 딸]은 신앙에 잠식된 채 버거운 일상을 이어가던 도러시가 생각지도 못했던 극한의 경험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작가는 런던 근교 마을의 교회에서 붙박이처럼 살아가던 도러시를, 기억을 잃은 채 런던 근교 홉 농장으로 돌아갈 방법을 잃은 채 런던의 거리와 근교 마을의 사립학교로 이동케 한다. 그리고 도러시의 절박한 상황과 더불어 그 공간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비참하고 피폐한 당대 가난한 이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본령을 잃은 종교와 제기능을 하지 않는 제도, 개인의 책임이 된 빈곤, 희망 없는 미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내면화한 작가의 시선이 주목하는 사회의 그늘 아래 군상들은 우스꽝스럽고도 처연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지만, 비틀린 인물들과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작가의 유머와 여유가 독자들의 숨통을 틔우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작가가 되기 위해 제국경찰을 그만두고 런던에서 경험한 밑바닥 생활과 이후의 사립학교 교사 생활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 덕에, 거의 아는 바가 없는 1930년대 영국의 어떤 실상들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주인공 도러시를 통해 드러나는 '늙은 영국의 노처녀'들이 봉착한 현실은 새롭게 다가왔다. 공식적인 여성의 사회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던 과거 유럽에서 결혼하지 않은 혹은 혼자된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의지처가 수녀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러한 전통이 사라지고 현대가 시작된 그러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낮은 시기 부와 명예를 가지지 못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의 행로에 대해서 말이다. 트래펄가 광장에서 노숙하고 몰려간 새벽의 카페 앞에서 누추한 입성에 머뭇거리는 도러시에게 그레타 가르보를 언급하며 핀잔을 주는 벤디고 부인의 말, 링우드 하우스 아카데미의 도러시가 근교를 하릴없이 배회하며 너도밤나무 아래 기대 앉아 자신만의 소박한 크리스마스 만찬과 함께 읽는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개연성도 설득력 있는 설명도 없이 기억을 잃고 또 되찾는 파격이 당혹스러웠지만, 갖은 곤경의 와중에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 언제나 충실한 도러시의 행보에는 응원과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의 마지막(?) 선택지가 이전의 일상과 능구렁이 같은 워버턴 씨와의 결혼 중 양자택일이라는 것이 무척 잔인하게 느껴졌다. 워버턴 씨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사랑을 돈으로 바꾸면 열 배는 더 의미 있는 내용이 된다는 촌철살인의 지혜를 도러시에게 선사했지만, 아무리 암담한 노처녀의 삶이 기다리고 있대도 그를 선택하는 것은 돈의 위력에 굴복하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행히(?) 도러시는 성 애설스탠 교회의 일상으로 회귀했다. 겉보기에는 이전과 다를 것 없고 심지어 오랫동안 삶의 중심이었던 신앙을 잃은 채 돌아와 계속되는 도러시의 삶은, 그러나 '주어진 것과 선택한 것'이라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숨겨진 차원이 다른 일상이다. 이야기가 환상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당대의 현실에서 또 다른 비약적 가능성은 설정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극한의 모험 같은 곤경을 차례차례 경험하고 돌아온 주인공의 앞날에, 작가는 꽤 근사한 결말과 미래를 열어둔 것 같다.
조지 오웰•이영아 옮김
특별 양장판 발행 2022.12.5, (주)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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