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직관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가능한 이야기인가 궁금해졌다. 저자는 워킹홀리데이로 간 런던에서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하지만 혹사당하며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낸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악덕 상사에게 저항한 대가는 해고 통보, 살인적인 물가의 런던에서 두 달치 월세 정도의 은행 잔고를 떠올리며 생존을 고민하던 중 숨만 쉬는데도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삶에 대한 의구심에 다다른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숙명 역시 근본적인 의심의 대상이 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등바등하는가 고심하던 저자는 불필요한 소비를 하나씩 삭제하며 잠잘 곳과 먹을 것, 교통수단 등 세 가지를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정리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만 해결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데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마저도 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해결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소비하지 않는 삶을 계획한다.
돈 없이 사는 삶을 위해 주변을 수소문하고 정보를 찾던 저자가 런던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우프(WWOOF,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s Fams "자원봉사자와 유기농 농장을 연결하는 상호 교환의 네트워크") 중 하나인 웨일스의 '올드 채플 팜'이다. 조상의 지혜를 빌어 석기시대 마을 같은 농장을 일군 프란은 흙집을 짓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 지으며 자연과 호흡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하고 머무를 수 있는 이곳에서 저자는 텃밭과 양들을 돌보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매번 고맙다고 말하는 이들을 통해 사랑받는다는 느낌에 감격한다. 심신을 갈아넣으며 일했지만 결국은 시스템에서 밀려난 도시와는 다른 관계와 질서 안에서, 자신이 그 자체로 쓸모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생존의 필수요소를 정하고, 자신의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해 궁구하던 저자는 우핑을 통해 무소비의 삶에 더해 사랑의 욕구에 대해서도 성찰하기 시작한다.
'올드 채플 팜'에서의 시간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대안적 삶을 경험해 자신만의 방식을 찾기로 한 저자는, 한 장소에 머무르는 기간을 1개월 내외로 정하고 이동 방법을 고민하다가 자전거를 떠올린다. 0원으로 가능한 방법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일, 기적처럼 런던의 한 자전거 카페에서 답이 오고 주인 캐서린은 자전거는 물론 필요한 다른 장비들과 인류애 가득한 '선행 베풀기'를 선사한다. 5개월 동안 여러 농장에서의 우핑 생활을 거치며 저자는 웜 샤워즈(Warm Showers)를 비롯한 여행자를 위한 전 세계적 무료 숙박 네트워크를 알게 되어 도움을 받고, 캐서린의 감동적인 호의를 통해 '0원살이'를 더욱 확신하게 된다. 2014년 10월 31일, 급작스러운 준비를 마친 저자는 '헤이 메도우 팜' 친구들의 긍정 에너지와 응원을 가득 받으며 1년간의 '0원살이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프로젝트의 규칙 중 마지막 8번은 "죽지 않는다." 무모하고 의아하게도 느껴지는 프로젝트가 저자에게는 그야말로 생사를 건 모험이었던 것이다.
'0원살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적지는 영국 남서부 서머싯에 위치한 '팅커스 버블', 화석연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며 전동공구 대신 손노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엄격한 친환경 공동체다. 모닥불을 지펴 준비하는 식사, 재래색 화장식, 3시간은 불을 지펴야 가능한 목욕,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어지는 노동 속에서 저자는 약속한 2주를 채우며 자신만 불편함을 느끼는 이곳의 '미개한' 생활 방식에 대한 의문과 회의에 휩싸인다. 팅커들은 땅에서 나는 것만으로 생계를 해결하는데, 일례로 사탕수수 재배가 야기하는 열대림과 동물 서식지 파괴 그리고 가공 과정에서의 자연 오염과 노동 착취, 불공정한 무역 시스템 등을 이유로 설탕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을 해하지 않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에게 문명 사회에 익숙한 생활의 불편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각한 기후위기에 봉착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최소한의 인터넷과 대중교통은 이용하지만 환경을 위해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지 않고, 허름한 차림과 손노동의 삶에서 자유를 느끼며 자연을 섬기는 삶. 팅커들의 고결한 신념과 실천에 대한 경외감과 쾌적한 문명에 대한 갈증을 동시에 느끼며, 저자는 다음 여정을 이어간다.
짐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전거를 교체하고 여러 도시를 이동하는 일 역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해결하면서 저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즈음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며 경고를 담은 초대장을 보냈던 크리스와 소통해 12월 방문 약속을 잡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동하고 살아가며 사람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는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이상한 사람,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저자의 세계관에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인 듯하다. 파트너 모락과 함께 사는 크리스의 집에 도착한 후 메일과 달리 냉랭하고 예민한 태도에 당황하지만, 소지품을 검사하며 대체할 천연 제품을 건네고 음식 생산 과정을 비롯한 현대적 삶의 병폐에 대해 세뇌하듯 늘어놓는 크리스의 '철학'에 저자는 어느 정도 감화된다. 현대적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 축산업, 어업 및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의 문제점 그리고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한 그의 철학에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적잖은 내용이 본문에 정리되어 있다. 더불어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연의 일부로서 알몸을 사랑하는 나체주의자이자 다자사랑주의자인 크리스와 모락을 통해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사랑에 대해서도 새롭게 사유하며, 다자사랑과 영적수행의 목적이 같은 것이라고 적는다.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도시에서의 '0원살이'를 위해 런던으로 향한 저자는 런던 운하에서 살아가는 보트 피플, '급진적 주거 네트워크'의 멤버들과 만난다. 프로젝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크레이그의 호화 보트에서 2주를 생활하고 버려진 집을 빌려 살아가는 스퀏팅 멤버가 되어 예술가들인 제이-메이 아지트에서도 생활한다. 그러는 동안 최소 소비를 지향하는 청년과 만나 무소비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먹거리 해결 방법인 스킵 다이빙(덤스터 다이빙)에 도전해 성공적인 '0원살이'를 이어간다. 그러는 사이 저자는 친구로부터 정통 프리건(Freegun,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총체적인 구매 거부 운동인 프리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소비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지닌 의도치 않은 급진성을 깨닫는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하고 침대에 누워 앞날의 생존에 대해 번민하다 시작된 '0원살이'는 저자가 생각한 것보다 넓고 깊은 변화로 확장되고 있었다.
'0원살이'의 절반을 지날 즈음 봄을 맞아 저자는 다시 '올드 채플 팜'을 방문하고, 외부의 자극 없이 정적인 농장에서 갑작스러운 생활의 격변이 불러온 내면의 소란과 마주한다.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많은 자연인들과 달리 여전히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연과의 연결감을 느끼지 못하며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던 저자는 프란과의 대화를 통해 7일간의 홀로 단식을 결행한다. 그리고 블루벨 계곡에서 홀로 캠핑하며 단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빛으로 가득 차올라", "대지와 나를 연결하는 생명의 끈"을 통해 자연이 몸에 들어와 피와 함께 전신에 흐르는 느낌과 함께, "자연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결된" 경험을 한다. 자신의 생명과 자연이 온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저자는 "자연을 섬기는 삶"이라는 강렬한 변화를 맞는다.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존의 필수 요소를 마련하는" 퍼머컬처(Permaculture)와 생태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웨일스의 '라마스 생태 마을'로 향한 저자는, 자스민과 사이먼이 각종 실험을 통해 자립 생활을 구현 중인 이곳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과 그를 위한 여러 기술을 배우고 경험하며 문명 사회의 노동과 소비가 아닌 자연과의 연결 회복 그리고 자립과 자족을 통해 생존과 사랑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프로젝트 10개월이 지날 즈음, 비자 만료일 이전에 영국을 떠나야 하는 저자는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리투아니아인에게서 '레인보우 개더링'에 대해 알게 된다. 런던의 친구집에 남겨둔 짐을 정리하며 1년 10개월의 영국살이를 정리하고, 히치하이킹으로 함께 발트 지역으로 떠나기로 한 친구의 사정으로 혼자가 되자 운명처럼 레인보우 개더링을 떠올리고 런던을 떠난다. 프로젝트 초기 자전거와 함께 선행 베풀기를 선사했던 캐서린의 봉고로 유럽 대륙에 당도해, 오롯이 혼자만의 히치하이킹이 시작된다. 섹스를 목적으로 차를 태워준 운전자도 있었지만 큰 난관 없이 친구가 있는 베를린에 도착하고, 레인보우 개더링에 함께 갈 동료를 페이스북으로 물색해 비슷한 여정을 진행 중인 나라를 만난다.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운전자들 중에는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흔쾌히 차를 태워주고 필요한 것들을 선물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레인보우 개더링' 장소에 도착한 저자는 또 다시 새로운 차원의 변화를 마주한다.
'레인보우'는 유목 인디언의 삶을 동경하며 자연과 결속된 삶과 사랑과 신비의 상징인 보름달을 기리는 이들, 레인보우 개더링은 1972년 미국에서 '부족들의 레인보우 개더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레인보우라는 이름은 호비 부족의 한 예언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지구가 병들고 동물과 식물이 죽어갈 때, 모든 국가, 인종, 종교가 모인 다양한 색깔의 새로운 부족이 나타나 지구를 구할 것이다. 그들은 'The Warriors of the Rainbow', 무지개 전사다."(243쪽) 애초 레인보우 패밀리만의 비밀스러운 모임이었던 개더링은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찬반 속에서도 그 정신을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는 추세 속에 그 폐쇄성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개더링이 열리는 시기와 장소의 경도와 위도 정도가 sns에서 공유되고, 참여자들은 준비하는 이들이 주변에 남긴 단서를 통해 찾아가 함께한다. 저자는 과거 참여 경험이 있는 동행 나라 덕분에 밤안개 자욱한 몽환적인 초원의 리투아니아 개더링에 무사히 당도한다.
레인보우 개더링은 낯선 참여자들을 "웰컴 홈"이라는 말로 환영하고, 모두가 둥그런 원 모양으로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신비로운 태초의 소리인 "옴~~~"의 강력한 진동과 에너지를 공유하고, 매직 햇의 노래를 부르며 자발적인 기부와 동참으로 마련한 먹거리를 푸드 서클을 통해 함께 나누며, 평화 조화 자유 자연 영성 사랑 연결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시공간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히피 문화와 보헤미아니즘의 영향도 받았다. 이 대항 문화 역시 국가 시스템, 자본주의, 소비주의, 대중매체, 위계질서, 폭력 등에 저항하고 사랑과 평화를 외친다는 점에서 레인보우 정신과 많은 면이 닮았다."(243~4쪽) 레인보우 개더링에서는 촬영과 화학 제품 사용을 금지하고 "성적 의도가 없는 나체 행위"를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권리로 여긴다. 이곳에서 문명 사회의 시간 개념은 현재의 평온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 날짜 역시 중요하지 않고, 미래를 그리거나 무언가를 기대하는 행위로부터도 해방되는 온전한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 무언가 필요할 때면 "커넥션!"을 외쳐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거짓된 인사나 표정 대신 마음으로 통하는 인연을 믿는 관계가 유지된다. 그렇게 각자가 원하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자연과의 연결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나누며 보름달의 절정을 함께 보내면, 각자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다음 여정을 향하는 것이다.
저자는 리투아니아 개더링에서 레인보우들과 쉽게 동화되지 못한 자신이 "구경꾼 또는 이방인의 눈으로 이들의 세계를 관찰"했다고 적지만, 이내 점차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나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적는다. 그리고 다음 여정 슬로바키아의 '레인보우 집'으로 향한다. 나라와 헤어지고 히치하이킹으로 슬로바키아에 닿은 저자는 이곳에서 자신의 세계를 관찰한다. "나의 세계를 더 깊이 알아갈수록 나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이 외로움은 외부가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오는 공허함이었다. 내게서 그 공허함을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레인보우였다. 레인보우 패밀리는 내가 지금껏 살면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든 온전히 '진짜'로 존재했다. 꾸밈없이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지금'을 살았다.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고, 몸짓은 물이 흐르는 듯했다(물론 모든 레인보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레인보우'로 통칭하여 부르겠다)."(263쪽)
여기서 만난 넵튠이라는 레인보우에게 자신이 느끼는 내면의 공허, 명상과 진리, 자연과의 연결, 평온과 해방감 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눈다. 흐름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연습이 필요하고 히치하이킹이야말로 아무것도 예측하지 않고 흐름에 순응하는 법과 인내심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고 우중 우연은 없으며, 영혼이나 참자아라고 할 수도 있는 '더 높은 자신'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 '머리'가 원하는 욕구와 갈망이 아닌 영적인 성장과 진화를 통해 자신의 참모습과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등. "당신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에요. 진정한 성장을 소망한다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지금 난 좀 이기적이었어. 음, 괜찮아. 다음엔 이기적이지 않으면 되니까. 그래, 다음엔 다르게 한 번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웃어넘기세요. 자신을 비난하거나 질책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향과 모습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야 해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야'라는 정의는 강력한 에너지를 만듭니다. 생각과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어요. 당신이 믿고 말하는 모든 것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지 마세요. ... '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노력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판단과 자책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276쪽)
넵튠과의 대화와 자기 관찰을 통해 머리보다 "저절로 일어나는 일"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한 저자는 슬로바키아 개더링 첫날 만났던 존스 베리 가족과 다시 만난다. 앤드류와 데비와 5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존스 베리 가족은 대형 트럭에서 생활하며 지구 곳곳에서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숲에 남은 레인보우들과 함께한 푸드 서클에서 저자는 '레인보우 카라반'에 대해 알게 된다. "최초의 땅에서 레인보우 전사의 소명을 다하는 거예요. 자유, 사랑, 연민을 위한 일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충분히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주고, 안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학, 아프리카에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고, 음악을 함께하고, 사랑과 평화를 아프리카와 나누는 것. 이게 바로 레인보우 카라반의 비전이에요."(285쪽) 각자 자신이 경험한 기적의 순간을 이야기하며 아프리카로 향하는 레인보우들과 조우하게 된 저자는 저절로 일어나는 가슴의 일을 믿고 그들과 함께하기로 한다.
아프리카라는 최종 목적지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레인보우 카라반은 존슨 베리 가족과 제각각 사랑과 평화의 열정을 마음에 품은 적잖은 히피들과 함께하는 모험이다. 십수 명 히피들의 대이동은 지나는 곳곳에서 관심과 이목을 끌며 호의를 받기도 하고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며, 미처 몰랐던 인연을 확인하기도 하는 여정이다.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소란스럽고 즐거운 분위기가 유지되기도 하지만,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며 눈을 가리고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닫는 수행에 들어가는 히피도 있다. 직관을 믿고 흐름을 따르고자 하는 몇은 트럭을 떠나 자신의 길을 떠나고, 개중 몇몇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저자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책에 싣기도 한다. 그리고 시리아 난민 가족의 피난길과 유사한 루트를 이동하며 특별한 연민을 느끼게 된 그들과 함께하려 도착한 난민 캠프에서,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적 긍정'을 잃지 않는 태도, 관대함과 평온함으로 타인과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 그러나 계획도 질서도 없고 누구 하나 주도하는 이도 없는 여정을 함께하며 걱정은 저자의 몫이 된 것 같다. '0원살이' 생활자에서 히피 수행자로 서서히 정체성의 변화를 겪고 있는 저자의 감동과 의문과 혼란과 내적 투쟁이, 레인보우 카라반에 내내 함께한다.
며칠간 도심을 통과하며 찾았던 깨끗한 물가, 천상의 계곡에 도착한 이들은 맑은 물과 숲에 치유받고 함께 영화 [성 프란체스코]를 본다. "자연과의 연결과 거룩한 가난을 통해 신의 사랑을 실천"한 프란체스코의 삶은 저자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고 "나의 가슴이 그의 진리에 반응했다"고 적은 저자는 그날 밤 "한참 지구와 회전하며 대지와의 일체감을 느꼈다. 그 이후로 며칠을 사람들과 말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로부터의 울림과 대지와의 연결 속에 고요히 머물고 싶었다."(352쪽) 천상의 계곡에서 존스 베리 가족은 일부 레인보우들과 이틀 뒤에 떠나 터키로 가는 여정을 선택한다. "사랑해!!!"라는 외침을 주고받으며 헤어진 몇 년 후 에티오피아에서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 걸려 데비는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궁극의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 그 어떤 죽음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355쪽) 천상의 계곡에 남은 이들은 묵언수행과 치유 의식을 행하며 각자의 고요함에 이르는 집중 수행의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날의 수행에서 저자는 "우주, 의식, 신, 연결, 사랑, 위대한 정신, 더 높은 자아.... 그게 무엇으로 불리든 이제 나는 그 세계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367쪽)는 고백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 여정은 반드시 홀로 행해져야 한다."(367쪽)는 가슴의 분명한 소리를 듣는다.
애초 소비하지 않는 삶, '0원살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저자의 과제였던 생존과 사랑은 레인보우들과의 만남과 수행을 통해 이제 "생존과 사랑을 초월한 세계"로, "'우주'라는 무한하고도 신비로운 진리의 세계"로 향한다. 다시 혼자가 되어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며 "흐름을 믿는 연습"에 돌입한 저자는 세르비아에서 기적 같은 도움을 경험하지만 한편 마을 캠프에 몰려든 난민이 아니었기에 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음을 깨달으며 세계의 모순과 죄책감을 뼈아프게 경험한다. 전쟁으로 고통받고 생존을 위해 피신한 곳에서도 백안시 되는 난민의 현실과 여행자로서 특별한 호의를 누리는 상황의 대비.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을 때 여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방의 신병교육대에서 소대장으로 교관 임무를 수행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이 일화에 이어져 기록되는데, 오랜 꿈이었던 군인으로 복무하며 '평화를 위한 무력'에 대해 회의하게 된 저자의 군 생활은 3년의 의무 기간을 마친 뒤 종료되었다고 한다.
2015년 10월 저자는 그리스의 친환경 비건 공동체 '프리 앤 리얼'에서 '0원살이' 1주년을 맞는다. 12월에 그곳을 떠나 가능한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고 가급적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터키와 조지아, 이란, 인도 등을 거쳐 2016년 10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가난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하면서 2018년부터는 '자연식물식'을 하는 강도 높은 비건이 되었고 2021년 봄부터는 지리산 자락의 버려진 '숲속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400쪽이 넘는 여정을 펼치기에 앞서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세계의 확장"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온 후 6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었는데, 각 절의 부제는 '빈집살이' '먹고 살기' '가슴이 원하는 일' '돈이 사라진 세계'다. 나처럼 제목에 끌려 책을 선택한 이들을 위한 프롤로그는,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훑어 보니 대략 10년에 이르는 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현재 시점에서 간명하게 압축한 것이었다. 긴 여정의 에피소드, 과정에서의 깨달음과 변화, 독자에게 전하고픈 주장들까지 다양한 온도로 쓰여진 글이어서 읽으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때로 갸웃거리고 불편한 마음을 달래며 책장을 넘기느라 잊었던 저자의 메시지는 이미 서두에 밝혀둔 셈이었던 것 같다.
분량이 꽤 되지만 읽으며 느낌이 이렇게 많이 달라지는 책은 오랜만이었다. 2년간의 '0원살이'와 방랑 기간 동안의 기록을 토대로 이후 프로젝트보다 훨씬 근본적인 변화의 삶을 살면서 숙고하고 정리해 묶어낸 글인 것 같은데, 이미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 어떤 시기를 거치면서 경험하고 느낀 의문과 좌충우돌과 혼란을 당시의 관점으로 생생히 설명하는 부분들에서 상당히 공들인 글쓰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생존과 정체성의 불안과 위기라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삶의 한 국면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소비하지 않는 삶'으로 전개되는 게 신선했고, 몇 권의 책에서 접했던 스킵다이빙과 생태 공동체에서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경험이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레인보우 개더링에 함께하며 관찰자에서 초보 수행자로 '진화'해가는 중반부터 "나가며"에 이르러 구도자로서 나름의 이론을 정립한 듯 현재 세계의 각종 위기를 언급하고 대안과 해법을 내놓는 부분은, 전혀 기대하거나 원한 바가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도시화와 산업화, 자본주의화를 거치며 파괴되고 파국을 향해가는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진단은 새로울 것이 없는데, 변화를 위해 수반되어야 할 무수한 구체적 요소와 복잡성에 대한 고려 없이 추상 수준에서 이어지는 당위적 설명들이 반드시 저자의 몫이어야 했을까. 물론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도전을 통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당사자로서의 진정성을 충분히 느껴졌지만 말이다.
저자의 솔직한 기록에서 내가 더 많이 공감한 부분은 자신의 여정과 프로젝트에 대해 때로 의구심을 느끼며 자문하는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자문들은 대체로 물리적 고생과 주변의 호의 그리고 어설픈 의미부여로 뭉뚱그려지고 마는 느낌도 들었다. 질문은 공감되는데 답변에는 공감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수행과 신비 체험으로 다시 태어난 저자가 더 이상의 질문을 멈추고 자신의 경험과 그를 통한 깨달음의 주장을 반복하는 느낌이어서 납득을 체념하고 그저 읽는 상황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진리를 찾기 위한 구도나 수행에 대해 책 한 권으로 알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와 절정을 거쳐 맥락을 세심히 고려하지 않으면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거나 거칠고 나이브하게 단정적인 결말에 이르러 설파하는 주장들이 내용의 옳고 그름과 별개로 당혹스러웠다. 물론 저자가 짚어내는 대로, 지금 나의 삶의 패턴을 바꾸고 싶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겠지만, 갑자기 도드라지는 가르치려는 태도에 거부감이 일었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저자가 그리스에서 자신을 당연히 채식주의자로 여기는 이에게 반발하는 마음과 행동을 적은 부분이 있는데, 후반부를 읽으며 내 마음이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못난 마음이지만 진짜 그랬고, 그런 마음이 이어져 절정이 이른 "나가며"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인데도 읽다 내려놓고 잃다 내려놓느라 정말 겨우 책을 다 읽었으니까.
책을 집어들 때마다 뒤표지에 적힌 세 줄의 발문에도 아쉬움의 눈길이 멎었다. "우리는 돈 없이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나 역시 궁금한 부분이었지만 그다음 대답처럼 따르는 문장이 굳이 "진짜 혁명은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지 않는 생활 습관에서 시작된다."여야만 했을까 싶어서 말이다. 어떤 행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임의적 대립물과 비교하는 것이 책에서 저자가 수없이 동어반복하며 주장하는 '진리'와 배치된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지금 국내에서는 잘 쓰이지도 않는 '화염병'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안 그래도 언론과 지배 세력이 마녀사냥하는 시위와 물리적 투쟁의 폭력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물리적이고 집단적인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방식과 시도 자체를 구시대적이고 불필요한 무엇으로 단정하는 듯해서 불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작은 부분에 딴지를 거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단 세 줄의 뒤표지 발문이어서 더 눈에 띄는 탓에 꼭 이 문장이어야 했나 싶었고, 책을 읽으면서 이따금 갑작스러운 비약이나 일종의 침소봉대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을 만날 때 일었던 반발심이 환기되기도 했다. "2022년 한겨레 선정 올해의 책 10선" 중 한 권이라니 나름의 반향도 있는 책인 것 같아서, 왜 굳이? 하는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무려나, 내게는 2023년 나님 선정 오래갈 여운과 혼란의 책이 될 것 같다. 지난해 여운과 혼란의 책은 단연 [짐을 끄는 짐승들]이었는데, 못지 않은 무게감으로 공감과 당혹의 양가감정을 선사하는 읽기였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까칠하거나 불퉁한 느낌이 내 마음의 반영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지간하면 저자의 마음과 의도를 이해하고 싶은 욕심도 내려놓지 못한 독자로서, 간만에 꽤나 에너지를 들이는 독서였다. 책 모임에서 읽었더라면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 텐데, 혼자 읽고 혼자 소화하려니 쉽지 않아 나만 원하는 기록이 참 길어졌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주 후의 여러 경험 속에서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걸 새삼 느꼈고 약간 교훈처럼 환기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혼자서도 크게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성정과 연륜과 체념을 다행스레 여기며, 생동하는 타인에 대한 기대 같은 것 없이, 다른 세상에 있거나 아주 멀리에 있는 이들이 전해주는 노래와 영화와 책과 이런저런 콘텐츠 들을 통해 감각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때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싶지만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떻게 살 것이며, 때로 혼자 너무 안락한 것 같아 불특정다수를 향해 민망한 마음이 들지만 세계의 고통에 내 몫을 더 얹지 않는 삶도 있는 거지 자위하고 만다. 지금의 내가 이런 나여서, 이렇게 불손한 독후감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투덜거린 것만큼 내내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나름 공감했거나 기억하고 싶은 본문 몇 부분을 애써 옮겨두었는데 언젠가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달리 느껴질지 궁금하다.
박정미
2022.10.28초판1쇄 2023.2.13초판3쇄, 도서출판 들녘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0) | 2023.07.28 |
---|---|
[기적의 도시 메데진] (0) | 2023.07.24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0) | 2023.06.24 |
[신부의 딸] (0) | 2023.06.18 |
[버마의 나날] (0) | 2023.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