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였고 저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아버지에게 헌정된 이 책은 혼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일찍이 아버지가 강조했다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이 언급된 부분을 읽으며 살짝 긴장이 되었지만, 다행히 과학 전문 기자라는 저자는 이후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간다. 혼돈과 함께 소환된 인물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의 20%를 발견하고 이름 붙였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평생 노고를 바친 어류 표본들이 모두 파괴된 현장에서 식별 가능한 물고기의 살에 바늘을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맸다는 일화와 더불어 그는 "혼돈에 반격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삶에 닥친 깊은 혼돈에 빠져 있던 저자는 모든 게 박살난 잔해 속에서 바늘을 든 그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에 대해 검색하고 한 세기 전 출판된 두 권짜리 회고록 <한 남자의 나날들The Days of a Man>의 절판본을 손에 넣은 저자는, 혼돈에 맞선 한 인간에 대해 파헤칠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1851년 뉴욕주 북부에서 태어난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1장의 제목) 데이비드는 어린 시절 밤하늘의 별들과 지상의 식물들을 관찰하며 이름과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이 경험하는 장소들을 지도로 정리하는 일에 열중했다.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매료된 소년이 몰두하는 일들은 청교도인 부모에게는 쓸모 없는 짓이었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존경스러운 형 루퍼트는 든든한 지지자이자 동료였다.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루퍼트가 북부연방군에 자원해 떠났다가 훗날 발진티푸스로 명명된 '군대열병'으로 사망한 뒤, 데이비드는 필사적으로 일기장에 자신이 관찰한 식물들과 라틴어 학명들을 새겨 넣는다. 깊은 상실감을 열정적인 수집벽으로 잊으려는 강박은 당사자에게 도취감을 선사하는 현상이라는 심리학자들의 지적을 저자는 덧붙인다.
어린 시절 5년 정도 동안 밤하늘 전체의 별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마친 후 스스로에 대한 상으로 '스타(Starr)'라는 미들네임을 붙였던 데이비드의 수집과 분류 강박은 "어느 섬의 선지자"(2장의 제목)와 만나면서 강화되고 발전된다. 코넬대에 입학해 3년 만에 과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일리노이주 게일스버그의 롬바드칼리지라는 작은 기독교 대학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데이비드는, 당시 유명한 박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루이 아가시가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22킬로미터 떨어진 페니키스 섬에 마련한 여름 캠프에 합류한다. 빙하기 가설로 명성을 얻고 40대에 하버드대 교수가 된 스위스 출신의 루이 아가시는 논문과 책에 의존하는 과학 교육의 실상을 우려했고, 직접 관찰을 통한 자연의 이해와 분류(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구상한, 모든 생물을 하등한 생물부터 신성한 생물까지 차례로 배열할 수 있다는 "자연의 사다리"(라틴어로는 "스칼라 나투라이Scala Naturae"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를 통해 숨겨져 있는 창조주의 계획은 물론 진보의 실마리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었다.
루이 아가시에 따르면 "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45~46쪽) 페니키스 섬에서의 활동은 아가시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선교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의 계획, 생명의 의미, 어쩌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길까지 해독해내는 작업이었다."(47쪽) 루이 아가시의 신앙과 학문적 소명이 담긴 페니키스 섬 여름 캠프에서 데이비드는 엄격하고 진지한 자연 관찰과 연구에 대해, 오랫동안 외롭게 골몰해온 작업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확신하게 된다. 훗날 첫 번째 아내가 되는 식물학자 수전 보웬을 만나게 된 것도 이곳이었다.
3장("신이 없는 막간극")에서 이야기는 저자 자신과 가족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 휴가차 떠난 매사추세츠주 웰플리트의 너른 습지를 함께 바라보며 문득 인생의 의미를 묻는 일곱 살 아이에게, 아버지는 "의미는 없어!"라고 단언하고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알려준다. 거대한 우주와 다양한 생물들의 활동을 설명하고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던 아버지는 자신만의 도덕률을 지키며 쾌락주의적인 일상을 영위했지만, 저자는 아버지처럼 대담하고 활력에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한다. 심한 괴롭힘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한 언니의 복도는 이후 저자를 겨냥했고, 수면제 과다 복용의 자살 기도가 실패한 뒤에도 죽음의 유혹은 강하게 따라붙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의 글귀가 걸려 있었는데, 저자에게는 때로 "네가 그 장엄함을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처럼"(61쪽) 비난으로 느껴졌다고 적고 있다.
청소년기의 터널을 지나 입학한 대학에서 저자는 빛나는 존재를 발견하고 몇 년의 노력 끝에 연인이 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차갑고 가혹한 세상에 웃음의 잔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63쪽) 곱슬머리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한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는 둘만의 안식처가 되지만, 각자의 일과 다정함을 공유하며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 시간은 7년에 그쳤다. 저자는 어느 밤 해변에서 만난 금발 소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나눴고, 그 일을 고백하며 곱슬머리 남자와의 관계도 끝난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저자는 다시 죽음의 유혹에 시달림과 동시에, 곱슬머리 남자의 회심이라는 망상 같은 희망에 매달린다. 3년 넘게 편지와 이메일을 보내며, 자신을 속이면서 점점 더 깊은 혼돈에 빠져들던 그 시기에,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66쪽)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폐허 위에서 바늘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스승의 축복과 지지 속에 페니키스 섬을 떠난 데이비드는 미국 중서부 전역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코넬대에서 분류학을 함께 공부한 친구 허버트 코플랜드와 함께 북미의 모든 담수어를 발견하겠다는 목표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열악한 환경을 무릅쓰고 다양한 표본을 채집해 연구 논문으로 출판하기 시작한 그들의 존재가 알려지고, 정부는 그일이 미국의 학문적 업적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시작한다. 1880년에 데이비드는 훗날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총애하는 제자 찰리 길버트와 함께 여러 달 동안 작업을 수행한다. 수많은 물고기들을 발견하고 이름 붙이는 과정에는 스승 루이 아가시가 중요시한 도덕적 교훈이 개입했고, 낯선 해안들에서 받은 어부들의 결정적인 도움은 휘발되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종의 물고기와 이름 들을 세상에 선보이면서 데이비드는 자신의 존재감 역시 함께 드러낸다. 인디애나대학의 종신교수가 되고 수전과 결혼해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데이비드는, 서른네 살에 대학의 요청으로 전국에서 가장 젊은 학장이 된다.
삶의 모든 면에서 승승장구하던 1883년 7월의 어느 날, 벼락으로 인한 화재로 데이비드의 연구실이 불타고 모든 표본과 자료가 소실된다. 평생을 바친 소중한 것들을 잃은 그는 실의에 빠지는 대신, 더 열심히 일에 매진한다. 1885년 11월에 아내 수전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슬픔에 빠지기보다 신속히 움직이며 매끄럽고 호화롭게 장례를 치른 그는, 2년이 지나기 전에 대학교 2학년인 18세의 제시 나이트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 수전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셋째 소라 역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십대인 두 아이를 기숙학교로 보낸 부부는 탐사 원정에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된다.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 "낙천성의 방패"를 가진 데이비드의 회복과 왕성한 활동은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부부(악덕 자본가이자 공화당 상원의원인 릴런드 스탠퍼드와 죽은 아들과 만나기 위해 영매를 찾아다니는 제인 스탠퍼드)에게도 알려진다. 1890년 블루밍턴으로 찾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팰러앨토에 세울 작은 학교의 초대 학장직을 제안한다.
1891년 나이 마흔에 스탠퍼드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데이비드는 화려한 해양 연구 시설을 만들고 친구들과 제자들을 채용해 교수진을 꾸린다. 캠퍼스 내의 표본 보관 장소로 정한 건물 앞에는 부부 역시 존경해왔던 루이 아가시의 동상이 세워진다. 정해진 수순처럼 성공가도를 밟아가는 데이비드의 인생은 여러 종류의 동물들과 함께하는 집에, 제시와의 사이에서 나이트와 바버라가 태어나면서 거의 완성에 가까워진다. 이 시기 대학의 지원으로 여러 대륙을 누비며 어류 수집 원정을 떠나고, 그 목록에는 일본과 한국도 있어서 신기했는데 덧붙여지는 설명은 없다. 학장 부임 1년 만에 설립자 중 릴런드가 사망하자 그의 일을 도맡은 아내 제인과 데이비드 사이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영매를 추종하는 제인과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어류 연구에만 치중하는 데이비드, 서로를 못마땅해하는 둘의 운명은 불운과 행운으로 갈리는데 그속에 도사린 반전은 이후 저자의 추적에서 자세히 밝혀진다.
5장 "유리 단지에 담긴 기원"은 존재와 명명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분류학자들이 "하나의 종을 최초로 명명할 때 그들은 그 최초의 표본을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매우 특별한 유리단지에 넣어둔다. 그 표본은 공식적인 과학의 기록부에 오를 때 그 종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기재된다."(95쪽)는 설명과 함께 "완모식 표본"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만약 이 표본이 소실된다면 그 자리는 무로 남겨지고 물리적으로 이 종을 대표하는 새로운 표본은 "신모식"이라 불린다고 한다. 저자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표본관에서 데이비드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바닷물고기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를 영접한다. "모서리가 없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학명을 따온 그 물고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 독특한 형상이다. 두 면 사이의 경계가 없는 물고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데이비드의 심중을 마음 밑바닥의 어두운 면에 대한 고백일까 추측하면서도 저자는 "그때" 그 답을 알지 못했다고 적는데, 이후에도 선명히 기술하지는 않는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 이유가 정확히 와닿지는 않았는데, 삶의 끝까지 일말의 반성없이 이어진 그의 신념과 열정에 대한 자기확신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독 사랑했던, 검은 눈동자를 가진 바버라가 아홉 살에 성홍열로 목숨을 잃은 1900년, 데이비드는 그 죽음을 가장 잔인한 재앙이자 파괴적인 충격이라고 회고하지만 곧 더 많은 물고기들을 찾아간다. 이후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데이비드의 족벌주의를 경계한 제인이 한 교수를 스파이로 붙이고 최측근 찰리의 학내 불륜이 발각되지만, 데이비드는 오히려 목격자에 대한 협박으로 위기를 넘긴다. 데이비드에 대한 제인의 불신과 해고 소문이 떠돌기도 했지만 1905년 어느 날 하와이를 여행하던 제인이 돌연 사망한다. 1906년 4월 18일 새벽, 리히터 규모 7.9로 추정되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30년을 오롯이 갈아넣은 그의 신성한 물고기들을 파괴하고 스승 루이 아가시의 조각상을 땅에 거꾸로 처박는다. 혼돈 속의 저자에게 구원의 빛으로 등장한 데이비드의 한 장면이 펼쳐진 시공간이다. 어떠한 절망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밀고가는 데이비드의 원동력을 찾기 위해 저자는 더 많은 자료들을 뒤지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친구가 전한 메일 속 카프카의 "파괴되지 않는 것"(7장의 제목)이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긴다.
데이비드의 개인적인 에세이에서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말을 발견한 저자는 "기만에 대하여"(8장의 제목) 사유한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검토하며 데이비드와 아버지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던 자기기만에 대해 성찰하면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긍정적 착각의 힘, '그릿(Grit, 끈질긴 투지)이라 이름 붙여진 한 특질에 주목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없이 나아갈 수 있는 자기확신, 부정적으로 발현된다면 어떤 비판과 위기에도 교묘히 대응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의지가 될 수 있는 그것. 1905년으로 돌아간 이야기는 9장("세상에서 가장 쓴 것")에서 미스테리 스릴러로 장르를 바꾼다. 1905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독이 든 물을 마셨던 제인이 얼마 후의 하와이 여행에서 갑작스레 사망한 사건, 현지 의사들은 스트리크닌에 의한 독살이라고 판단했지만 급히 하와이로 날아온 데이비드에 의해 과식과 협심증으로 사인이 돌변한 사건. 당시에는 애매하게 묻혔던 사인은 이후 의구심을 가진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조금씩 파헤쳐졌고, 그 흔적을 좇던 저자는 제인이 죽고 얼마 뒤에 데이비드가 남긴 다양한 색채의 그림들 그리고 그가 기록한 물고기 채집 방법에서 스트리크닌을 발견한다.
이탈리아 알프스의 아오스타라는 마을은 심신의 장애를 지닌 이들의 안식처로,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가 가족에게 거부당한 이들에게 음식과 주거를 제공하고 돌보면서 사회에서 낙인 찍히고 배제된 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과 속도로 존엄한 삶을 누리는 곳이라고 한다. 1880년대에 이곳을 방문했던 데이비드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10장의 제목)으로 각인된 곳이자, 루이 아가시가 강력히 우려한 "인류의 쇠퇴" 현장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유전에 경도된 데이비드는 가난과 게으름을 비롯한 인간의 거의 모든 능력과 특징 역시 혈통의 문제라고 믿었고, 학교 안팎에서 우생학(1883년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만든 말이라고)의 열렬한 전도사를 자처했다. 우월한 유전자만 살아남기 위해 열등한 유전자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부적합자"들에 대한 불임화 수술의 합법화는 중요했고,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은 몰살되어도 마땅했다. 그는 우수한 인간이 희생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페니키스 섬에서 루이 아가시의 은총에 매혹되었던 데이비드는 다행히도, 종의 다양성과 자연의 불확실성이라는 다윈의 생각에 죽을 때까지 반대한 스승과는 의견을 달리 했지만 이는 인간계에 대해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생물의 위계와 "사다리"(11장의 제목)에 생이 끝날 때까지 집착한 데이비드의 지극한 오류의 이유를 저자는 혼돈으로 추정한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도 불안을 안겼던 그 느낌. 그보다는 한평생 밀고온 신념에 대한 자기부정과 모든 것이 무화될 가능성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는데, 이 역시 혼돈이지만 조금은 다른 결이 아닐까 한다. 아무려나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207쪽) 가느다란 구원의 섬광을 좇아 일생을 파헤치는 동안 자주 당혹감을 느끼고 어느새 경멸하게 된 데이비드와 자신이 어떤 측면에서는 같은 것을 갈망했다는 사실을 저자는 숨기지 않는다.
희망을 기대했던 대상에게서 황량한 공허를 확인한 저자가 향한 곳은, 데이비드가 치켜든 우생학의 깃발 아래 수많은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구금되어 불임화되고 삶을 짓밟히고 때로 목숨을 잃기도 했던 버지니아주 간질환자 및 정신박약자 수용소다. 데이비드의 생시 강제 불임화의 대상이자 중요한 소송의 주인공이었던 캐리 벅의 후손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어렵사리 수소문해 십대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고 불임화 수술을 당한 후 나올 수 있었던 애나 그리고 애나의 돌봄으로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메리를 만난다. 둘은 한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고 마을에서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우생학과 권력이 온전한 삶을 정면으로 부인했지만 결국 살아남아 서로에게 다정함과 상냥함의 그물망이 되어주는 사람들. 우월성과 완벽성이라는 임의적 기준으로 모든 것을 위계화해 줄세우고 취약성을 말살하려는 우생학적 비전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호혜적인 삶의 실질적인 힘과 아름다움. 그것을 저자는 잡초처럼 보이지만 약초가 되고 염료가 되고 화관이 되고 소원빌기의 매개가 되기도 하는 "민들레"(12장 제목)를 통해 표상한다. 그리고 너무 어렸던 일곱 살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관점"을 환기하고, 그때는 아버지에게 돌려줄 수 없었던 뒤늦은 대답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그런데 마지막 장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는 더욱 놀라운 반전이 담겨 있다. 사후에도 기념비적인 학자로 명망이 높은 데이비드의 생물 분류가 학문적으로 무화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 발견, 그러니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상징이나 은유가 아닌 학계의 기정사실로 확증되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1980년대 분기학자들의 발견은, "타당한 진화적 집단은 특정한 한 조상의 모든 자손을 포함해야 하며, 다른 것은 하나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것"(237쪽) 그리고 "종들이 거쳐 간 시간의 흐름을 가장 신빙성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이라고 부른 특징들, 그러니까 새롭게 추가된 특징들"(238쪽)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고, 이는 데이비드가 쌓아올린 표본의 거탑들이 실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범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산꼭대기에 사는 모든 동물을 '산어류'로 범주화하는 엉뚱한 예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쉽게 설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어류'는 인간의 직관이 빚어낸 망상적 범주일 뿐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명한 사실이자 상식으로 당연시되어온 '물고기',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 생물 범주라니. 저자는 여러 관련 기관 종사자와 과학자 들을 인터뷰한 내용과 릭 윈터바텀이라는 분기학자의 토로를 인용한다.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244쪽) 독자들의 충격을 진정시키는 것까지 그의 몫은 아니겠지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겠지만, 저자는 별들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게 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수많은 이들의 '별과 물고기의 상실'에 대해 열거한다. 어류의 해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은 무엇일까, 그것이 여전히 추상적인 질문이라면 인간의 무지와 오류와 인식과 직관이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또 수용되는가.
짧지 않은 에필로그는 저자의 삶에 밀착한다. 물고기를 포기하고 시카고를 떠나 워싱턴DC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한 저자의 뇌리에는 여전히 곱슬머리 남자와 총이 자주 떠올랐지만,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낯선 곳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 위에 그려놓은 선들 너머를",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간절히 보고 싶어한 그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에메랄드색 눈을 가진 여자는 저자의 아내가 되었고, 저자는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263~264쪽)임을 말한다. 그리고 과학의 세계에도 저자의 가족과 이웃들의 세계에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알 수도 없었던 새로운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 하나를 얻었다. 이 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267쪽), 저자는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268쪽)고도 말한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우생학의 망령, 인종주의자들의 공격에 이렇게 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268쪽)
내 차례가 되어 추천한 6월의 모임 책이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길 위의 편지]와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와 함께 투표에 부쳤는데 당당히 선택되었다. 이래저래 많이 회자된 덕에 제목은 익숙했고 책에 따라붙는 알듯말듯한 찬사에 궁금증이 일어 사두었는데 올해 참 책을 잘 안 읽기도 하고 읽는 속도도 느려진 탓에 묵혀두다가 모임 책이 되었다. 선언적이지만 갸우뚱하게 만드는 제목과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부제의 조합, 어둡지만 따뜻한 느낌의 삽화가 그려진 리커버 표지가 마음에 든다고 느꼈는데, 내일이 모임이므로 그래야 했지만 오랜만에 내려놓는 사이를 아쉬워하며 하루만에 다 읽은 책이기도 하다. 잊고 싶지 않은 부분이 많아 정리하다 보니 요약편집증을 이기지 못하고 또 길어졌는데, 기억력이 심히 감퇴하고 있어 기록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탓도 있다. 아무려나-
개인의 고통에서 시작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연루된 현대 과학사의 미국사의 그늘을 관통하고 반면교사로서의 깨달음에 이르는, 여럿의 이야기들이 중첩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였다. 따로 존재할 때는 별로 관계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물과 사건 들을 정교하게 엮어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서술을 통해 생성되는 의미들, 저자와 데이비드의 삶 그리고 과학사와 미국 사회라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지면서 풍부해지는 메시지들이 흥미로웠다. 데이비드의 개인사와 그의 일의 부침 혹은 반성적 관계를 직관적이고 운명적인 계시처럼 기술한 부분들(첫 아내 수전과 두 번째 결혼, 아기 소라의 죽음 후에 편애하던 바버라의 죽음까지)에서는 살짝 갸우뚱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선을 넘지 않는 해석에 수긍이 됐고 연결과 편집으로 설득력을 취득한 독특한 글쓰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주요 내용과 주제 못지 않게 혼돈 그 자체인 저자와 데이비드와의 관계와 긴장, 여전한 현실임에도 강력한 명맥은 숨겨져 있는 듯 보였던 우생학의 다크 투어리즘, 가장 큰 세 번의 반전(저자의 성정체성, 데이비드의 제인 살해 의혹, 어류의 해체)은 차원을 넘나들며 마지막까지 눈길을 사로잡았다.
삶의 밑바닥에서 혼돈을 극복하고자 했던 자신의 몸부림은 살짝 내려 놓은 채, 데이비드와 그의 '부적합자'들의 흔적을 좇으며 맹목적 진화론의 오류와 우생학의 흑역사 그리고 과학계 밖으로 좀처럼 내보낼 수 없었던 비밀을 세상에 드러낸 저자의 노력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구원의 섬광을 발견하고 추적한 자가 실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저자의 전율과 그 너머로의 도약에 대해, 당분간 떠오를 것 같다. 새삼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어보고 싶어졌고, 한국에도 존재했던 '부적합자들의 처소'였을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이 떠오르기도 했다. 제인이 영매를 좇는 부분에서는 [나이트메어 앨리]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묘사들이 많아서 영화화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 실린 유일한 사진인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거꾸로 땅에 박힌 루이 아가시의 동상의 강렬함을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직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던 현대 초기의 영미권 세계는 인권 개념 따위 없이 인류의 오만이 최고의 정점에 달했던 시공간이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대의 빛과 어둠은 오늘날까지도 꽤 막강한 영향력을 알게 모르게 행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궁금해진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자주 만나고 싶은 시공간.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나름의 의지와 어떤 운명적 만남으로 마침내 작은 빛을 만난 저자의 이야기가 에필로그에 이르러 너무나 영롱하고 환하게 생동하는 점이 낯설기는 했지만, 백 명은 될 만큼의 이름들이 난무하는 '감사의 말'을 읽으며 이런 다정함이라니 싶었다.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등장하는 인상적인 삽화의 일러스트레이터 케이트 샘워스의 이름도 '감사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중간중간 괜히 이름이 궁금해 책장을 뒤적거렸던 게 생각나서 앞표지 날개나 서지정보에 따로 실었다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 본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려 네 쪽에 걸쳐 진을 치고 있는 '찬사'들도 조금 아쉬웠다. 긴 에필로그에 이은 삽화와 변화(책 출간 6개월 후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 이름이 붙은 건물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에 대한 몇 마디와 감사의 말, 긴 주석까지 후미에 들어가는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나무랄 데 없는 책이라면 '찬사' 정도는 제일 마지막에 배치해도 좋지 않았을까. 빠짐없이 차례대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자로서, 시작부터 쏟아지는 찬사들의 첫 쪽을 읽다가 지레 질려서 책을 다 읽은 후에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아쉬움도 없는 책을 어떻게 만날 수 있으랴. 좋은 독서였다.
룰루 밀러•정지인 옮김
2021.12.17.1판1쇄 2023.1.25.1판28쇄 펴냄,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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