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책을 통독하였다. 연초 [그린나이트]와 얼마 후 [베네데타]를 보고 새삼 서양 역사가 궁금해져서 몇 권의 책들을 찾아 보았었다. 상반기에 도서관에서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으면서도 흥미가 생겼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고 서양 역사와 문화예술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절감했다. 즈음 kbs에서 시작한 [예썰의 전당]을 재미있게 챙겨보며 신화 읽기의 필요성을 다시 깨달았는데, 전혀 모르는 와중에도 어마어마하게 방대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 선뜻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영화나 책은 계속 볼 테니 읽어봐야겠다 싶어졌고, 나름 고심하다 근작 중 한 권짜리를 시작으로 삼았다.
카오스가 생겨나고 가이아와 타르타로스, 에로스 등 최초의 신들이 만들어낸 우주로부터 시작된 신들과 반신반인의 영웅들, 인간들의 이야기는 과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여 얽혀 전개되었다. 하지만 천지창조부터 기원전 고대 세계까지 이르는 동안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과 일화들이 현재에 남긴 적잖은 흔적들을 깨닫는 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과 언어와 현상의 근원이 된 무수한 존재들의 활약상은, 맥락이 제거된 채 단어로만 익숙했던 것들의 유래를 새롭게 알려주어 새삼 앎의 기쁨을 선사받는 기분도 들었다. 저자의 말대로 가끔은 '왜지'? 라는 의문을 내려두고 오픈 마인드로 받아들여만 하는 부분들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완전히 초심자이기 때문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스토리나 이름이 나오면 반갑고 낯선 이름과 사건이 이어질 때는 흥미로운 반복이었다. 오랜 시간 명멸한 이야기답게 여러 버전이 존재하는 대목에서는 약간 손가락 빠는 심정이 되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 덕에 복잡한 이야기들을 좀은 부담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도 같다. 신화가 당대 지배권력의 행태를 반영하고 풍자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비유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를 통해 후대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추정하고 때로 흔적이 발굴되기도 한다니 수긍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말이다. 모든 신화가 결국은 인간의 상상과 경험과 기록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일 테니 당연하겠지만, 막연히 멀게만 느꼈던 입장에서는 미처 몰랐던 다양한 매력을 확인하는 독서였다. 저자의 쉽고 친절한 서술 덕분이기도 했을 텐데, 한편 곧잘 고답적인 해설과 마뜩찮은 교훈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다른 책들도 찾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의지가 솟았다.
가장 큰 아쉬움은 책의 만듦새와 관련한 것이었는데 오기와 오타 등이 많아서 필자의 전문성에 기대어 출판사가 감수와 교정 교열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560쪽에 이르는 분량이니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해 눈에 띌 때마다 거슬리는 걸 참으며 읽다가 376쪽에서 같은 대상에 대해 뱀이랬다 용이랬다 하는 부분부터는 짜증이 나서 메모를 시작했는데, 목록 중 내가 틀린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무용한 짓이기도 해서 에너지 낭비 최소화를 위해 쪽수와 대략의 해당 부분만 적었는데, 혹시라도 어디엔가 도움이 될까 싶어 옮겨둔다.
책을 다 읽고 판권면을 살펴보며 다시 한 번 놀랐는데, 이 두터운 책의 서지 정보에는 필자와 발행인 딱 두 사람의 이름만 있었다. 유서 깊은 출판사의 오랜 전통인지 모르겠지만, 편집자나 디자이너 등 책을 만들 때 실제로 수고했을 노동자의 이름이 하나도 없는 것에 시큰둥해졌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느꼈다. 책의 형식적 완성도를 떠올리며 두 명이서 만들었나 싶은 불퉁한 생각도 들었는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테고. 귀찮아서 이 출판사의 다른 책을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신화와 영웅 같은 특별한 존재들을 다룬 내용에 걸맞게 이 책에 한해 쓴 사람과 펴낸 사람 이름만 적은 거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 판권면을 유심히 보는 독자로서, 여러 과정에 함께한 이름들이 세세하게 빼곡히 적혀 있다거나 특별히 출간일을 신경쓴 게 느껴지거나 할 때 예기치 못한 감동을 받고 책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질 때가 있다. 예전에 [판지셰르의 사자, 마수드]를 푹 빠져 읽고 출간일이 그의 3주기날인 걸 보고 울컥했고 책을 펴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물론 오해일 수도 있고 아주 소소한 취향이지만 나름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아무려나, 판권면이야 출판사가 알아서 할 일이고 혹시 재판에 들어간다면 책 전체에서 암약하는 오기와 오타 들은 바로잡아주면 좋겠다.
376p 아레스의 큰 뱀
378p 아레스의 용/아레스의 뱀
390p 이오카스테/이오카스테스
392p 그들의 싸움에 때문에 고통받을 테베 백성들을
398p 안티고네 역시 동생을 설득에 실패합니다.
412p 지금의 그루지야가 옛날의 콜키스였는데 ... 조지아
441p 자신의 뤼라를 선물로
442p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켜고
445p 그의 뤼라를 하늘의 별자리로
449p 페이리토오스와 함께하데스의 왕국로 내려갔습니다.
451p 영원히 하늘을 밝게 빛나는 별자리가
453p 언제든지 도와주겠는 맹세도 / 누가 헬레네에의 신랑으로 뽑히든
470p 복수의 여신들운 자존심이
476p 막강해 보이는 사람을vv무너뜨릴 수
481p 트로이아/트로이
483p ‘트로이아 목마’/‘트로이 목마’
497p 칼륍소의 섬을 따나 다시 집을 향해
503p 신들이 뜻이 아니었나 봐요.
508p 『아이네이스』 제1권
509p 아에네아스는 디도를 떠나기로 합니다.
514p 원로원에서 두 명의 집정권을 임명했습니다.
527p 샘물 속 사내도 기뻐하는 얼굴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지요.
532p 귀게스 눈을 사로잡는 것이
549p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수는 없을 겁니다.
551p 도성에는 부와 권력이 가진 주류가 차지하는 반면
552p 제우스를 만나 단판을 짓겠다는 겁니다.
556p 세 여신은 농부들과 함께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갑니다.
557p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러저리 다녀 보니
김헌
2022.3.30초판1쇄, (주)을유문화사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0) | 2022.10.17 |
---|---|
[깻잎 투쟁기] (0) | 2022.10.07 |
[휴가 갈 땐, 주기율표] (0) | 2022.09.30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0) | 2022.09.27 |
[독일의 가을] (0) | 2022.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