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박사 과정으로 유학 간 메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사회인류학 수업의 연구 과제를 고민하던 중 학내의 '공동체 지원 농업' 회원 모집 천막을 발견하고 가입한다. 자원 봉사와 연구를 진행하며 1년간 농업 생산자와 소비자를 넘나드는 시간을 보내면서 한국의 농업 생산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이후 한국에서 이주단체의 투쟁에 동참하며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게 되고 반 년 넘게 캄보디아 현장 연구를 수행하면서 한국행을 꿈꾸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고 고용허가제와 관련한 현지의 상황을 확인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안산의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자원 활동을 하고 전국을 다니며 농업 이주노동자들과 고용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연구한 내용이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 담겨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이 보통의 한국 사람에게 잠시나마 알려지는 건 대체로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단체의 활동이나 충격적인 죽음에 대한 언론 보도를 통해서인 것 같다. 거액의 장기간 임금체불, 계약서와 판이한 장시간의 강제 노동과 저임금, 사업주의 성희롱이나 성폭행, 상시적인 인권 침해와 차별, 그럼에도 사업장 변경이 어려운 제도적 문제 등의 내용을 담은 실태조사 보고서가 발표될 때 혹은 추운 겨울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더운 여름 돼지 농장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사연이 보도될 때처럼 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온 지 수십 년이 지났고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지도 20년이 가까이 되었다. 그간 수많은 사건들과 죽음들을 통해 어느 정도의 제도 개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가혹한 소식은 들려온다. 큰 문제를 겪지 않고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지금도 내게까지 알려지지 않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경우가 특히 그렇고, 그들은 제조업과는 또 다른 문화와 환경이 야기하는 복합적인 문제들 속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하는 것도 없이 '이런' 책 읽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경험의 접점이 있다 보니 궁금했다. 2012년까지 5년 정도 이주단체에서 일했고, 당시는 농업 이주노동자의 이입이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엄청난 사회적 충격과 함께 도입된 고용허가제가 제조업에서 안착되는 시기였고, 책에서도 언급하듯 3년으로 제한한 기간으로는 국내의 소위 3D 업종 인력 부족을 해결할 수 없어 제도 보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3년의 재고용이 가능해진 때였다. 제도의 안정세로 제조업 이주노동자 모두가 상식적인 노동 경험을 갖게 된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상담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가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고 이주단체들을 중심으로 다문화 교육이며 축제 같은 다양한 지원 사업들이 펼쳐지면서,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듯한 착시 현상도 나타났다. 그 즈음 농촌의 일손을 메우기 위해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와 일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그들의 현실이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깻잎밭이 특히 주무대가 된 이유에 대한 설명과 고용주나 인력업체 사장의 인터뷰였다. 한 해에 두 번 수확하는 배추나 온난화로 인한 농작물 재배 한계선 북상의 영향을 받는 사과와 달리 깻잎은 기후 변화에 비교적 안정적이고 파종과 관리와 수확 과정에서 1년 내내 집약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농업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작물이라고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전 주로 주변의 중노년 여성들을 일당으로 고용할 때는 승합차로 출퇴근을 책임지고 점심이나 새참을 성의껏 대접하고 휴일은 꼬박꼬박 쉬고 명절 상여금을 챙기며 이런저런 고충까지 신경써야 했지만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너무 편해졌다고 고용주들은 말한다. 게다가 제도는 표준근로계약서의 '근로 시간 11시간, 휴게 시간 3시간'이라는 비현실적인 관용구를 통해 매일 2시간 이상의 공짜노동을 인정하고, 고용주가 제공하는 임시 숙소에서 1인당 매월 20만 원 이상의 기숙사비와 관리비를 공제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많은 수의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밭에 붙어 있는 비닐하우스나 농로 주변 컨테이너 등 임시 숙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자체로 안전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비위생적이며 때로 화장실도 없는 불편하고 협소한 공간에서 몇 명이 함께 지내며 내는 기숙사비와 관리비는 고용주의 또 다른 수익이 되고, 와중에 수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감시하고 성희롱과 성폭행을 가하는 고용주들이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증거로 입증할 수 없는 성범죄는 없던 일이 되거나 신고를 해도 임금체불 등의 명확한 사유로 돌변해 사업장 변경이 가능할 때도 있지만, 대다수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변경은 제도가 보장하는 몇 가지 사유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에는 체류 기간을 넘겼거나 악질적인 고용주로부터 도망쳤거나 등의 이유로 미등록 상태를 선택한 이주노동자들이 오히려 합법일 때는 없었던 협상력으로 월급을 인상하거나 가족결합권을 누리는 사례가 나온다. 인력업체 사장의 인터뷰를 통해서는 소개비를 제해도 등록 노동자와 별 차이 없는 일당으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드러나는데, 이는 단순히 제도의 허점이 아니라 근본적인 설계와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부분일 것 같다.
코로나19의 확산은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모두의 위험이었다. 싱가포르 이주노동자 기숙사에서의 집단 감염 사례가 보도되면서 한 매체가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감독을 인터뷰하며 한국의 이주노동자 집단 감염 우려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원래부터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 왔어요. 한 달에 두 번 쉬는데 그 쉬는 동안 사람을 만나면 몇 명이나 만나겠어요. 농촌 사회에서는 아주 보이지 않는 존재예요.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완전히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니,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상황인 거지요."(195쪽) 몰랐는데, 2020년 4월 29일 당시 정세균 국무총리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미등록 외국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민을 향한 정부의 언명이 언제나 '불법체류자'였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인데, 코로나19 감염 확산 우려가 불러낸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하다. 정권이 바뀌기는 했지만 며칠 전 포털에서 본 '불법체류자 정부합동단속 시작' 뉴스가 떠올랐는데, 수십 년간 사실상 상시적이었던 단속과 추방 정책이 그 반인권성을 차치하더라도 실효나 현실과 무관하게 내부의 적을 규정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기제일 뿐이라는 걸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5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책에는 이주노동자, 특히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가 그야말로 발로 뛰며 연구한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직접 지원 활동을 하며 만난 많은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사연과 농업 이주노동자 고용주 및 인력업체 사장의 이야기, 고용허가제와 한국행과 관련한 캄보디아 현지의 사정들,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에게 부당하게 작동하는 제도적인 문제점들(특히, 농업 이주노동자는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장기요양보험료를 포함해 월 10만 원 이상의 건강보험을 납부해야 하는 부분)까지 사례와 함께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등장하는 사연들은 대체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었지만 저자는 그 모든 이야기를 감정을 배제하고 차분하게 기술한다. 덕분에 이주노동자의 고마움을 알고 그들이 떠나려 할 때 처우를 개선하며 붙잡으려 노력하는 고용주나 자신이 함께 간 남의 사업장에서 다짜고짜 욕하는 다른 고용주에게 항의하고 '우리 직원'을 다른 데에 보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고용주의 경우처럼 상식적인 이야기에 울컥 감동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몇 년치 임금을 체불하고도 배째라고 나오는 고용주, 수시로 성희롱을 일삼으면서 임금까지 체불하는 고용주, '스마일'을 강요하며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교육을 한다고 말하는 고용주 등 너무나 어이없는 현실이 불러오는 왜곡된 반응이다.
책은 말미에서 코로나19를 겪으며 미등록 이주민의 체류기한을 최대 10년 연장한 미국이나 농업, 어업, 외식업 등 14개의 노동력 부족 업종에 취업한 이주노동자의 체류를 무기한 연장하는 정책을 검토 중인 일본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의 미등록 이주민 관련 정책들을 소개한다. 특히 사회 현상의 많은 부분을 한국보다 십여 년 정도 먼저 경험한다는 일본의 해당 정책이 빠르면 2022년 4월 시행될 것이라고 썼는데 정말인지 궁금하다. 단속의 엄포가 여전한 한국 정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방향이지만, 급격한 고령화와 인력 부족이 이미 현실인 한국도 언젠가는 고민할 부분이 아닌가 싶고 말이다.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낀 것은 면밀한 기록의 중요성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후 수십 년간 많은 이들이 지원 활동으로 함께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많은 사연과 쌓였을 이야기에 비해 대중서로 출간된 기록은 극소수인 것 같다. 물론 때로 너무 무겁고 당장 내가 뭘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여서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이렇게라도 접하면 어디선가 어떤 캠페인이 벌어질 때 이름 하나 얹고 작은 마음 하나 보내는 정도라도 더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주의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 이미 한참이지만, 책을 읽다 보니 굳건한 국가와 주권의 장벽만큼이나 전지구적인 사회경제적 계급의 위계 역시 공고하게 고착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이주민이 주인공이거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영화가 종종 개봉했고, 특히 몇 년 전부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적잖은 이주 관련 영화들을 보았었다.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일자리와 환율의 마법을 좇아 국경을 넘는 이들의 행렬은 중단되기 어려운 흐름일 것이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주노동자와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사회의 노력은 여러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 같다. 구성원의 인식을 좌우하는 제도의 변화가 가장 핵심적이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당장 길에서 마주치는 초면의 이주노동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히 실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일상을 지탱하는 수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모르는 이주노동자를 떠올리며, 저자가 인용한 시 구절의 의미를 새겨보는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 정현종
우춘희
2022.5.18초판1쇄발행,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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