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6. 20:20

 

 

영화의 배경이었던 덕에 아메리칸사모아를 처음 알았다. 폴리네시아 중심부인 하와이와 뉴질랜드 사이의 사모아제도 중에 서쪽 지역은 독일과 뉴질랜드의 통치를 받다가 1962년에 독립해 사모아라는 국가가 되었고, 동쪽 지역은 현재도 미국령으로 아메리칸사모아라 불린다고 한다. 200㎢의 땅에 57,000명가량이 살아간다는데 감이 안 와서 찾아보니, 240.2㎢의 통영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절반쯤의 인구가 살아가는 곳이다.  

아메리칸사모아가 영화의 배경이 된 이유는 2001년 월드컵 예선 호주전에서의 31:0 패배 때문이다. FIFA 랭킹 최하위에 쉽게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을 보유하고 만 아메리칸사모아 대표팀의 이후 목표는 오로지 한 골, 2011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수단은 딱 봐도 오합지졸인데 엉망인 경기 중 쉬는 시간에 대기실에 모인 그들에게 대표팀 감독은 이제부터 심한 말을 하겠다며 누가 들어도 심하지 않은 “Bad!”를 연발한다.  

즈음 미국에서는 퇴출 위기에 놓인 토마스 론겐이 구단 관계자들과의 면담 끝에 아메리칸사모아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는다. 2014년 월드컵을 준비하며 새로운 국대 감독을 선임한 아메리칸사모아, 공항에 도착한 론겐을 tv프로그램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 카메라가 맞이하고 촬영 감독은 또 축구협회 관계자고 뭐 그렇다. 아메리칸사모아 국대 선수들 역시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며 축구도 하고 있고, 대표팀은 중요하지만 누구 하나 축구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것이 그곳의 현실이다.  
 
이후 전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의 정석을 비껴가지 않지만, 간결한 설정과 짧은 대사를 통한 상황의 고유성과 캐릭터의 개성이 잘 드러나고 전반적으로 과하지 않은 톤이어서 오글거림 없이 볼 수 있었다. 평생 가볼 일 없을 아메리칸사모아의 시원한 풍광과 아직은 문명에 찌들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주는 여유로움 역시 좋았다. 개인적으로 축구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보니 낯선 배경과 사람들이 발산하는 청량감이 좋았고 축구 외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흥이 더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실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요 캐릭터들의 개성과 사연도 나름 매력적인 요소였다. 인성 논란 전력의 이혼남인 토마스 론겐 감독은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하지만 남모르는 아픔과 인간미가 있다. 아메리칸사모아에 도착해 안부 전화 대신 딸의 음성메시지를 반복해 듣는 모습이 의아했는데, 하나뿐인 딸은 몇 년 전 이미 세상을 뜬 상태다. 동상이몽의 국대팀이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에이스 선수 ‘파파피네’ 자이야의 존재는 극적이었고 그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태도는 감동적이라는 느낌을 덧붙이는 게 이상할 정도지만 감동적이었다.   

부산에 갔으니 쾌적한 art2관에서 한 편은 봐야겠다는 욕심으로 찾아보다가 선택한 영화였다. 참 좋았던 [조조 래빗]을 떠올리고 기대했는데 그에 비하면 꽤 헐렁하게 느껴졌고 장르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스포츠 소재 ‘감동 실화’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는 못한 작품인 것 같다. 그래도 ‘펠레 마라도나 론겐’ 같은 위트 넘치는 대사가 기억에 남고, 마지막에 보여주는 미국 cbs의 해설자 론겐 감독, FIFA 평등 앰배서더 자이야, 40대로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흑역사의 골키퍼 니키 살라푸 등 주요 인물들의 현재는 흥미로웠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도 영화 시작과 마지막 쿠키에 발랄하게 등장하는데, 그건 그냥 그랬다.  


2/1 cgv서면 art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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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