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11. 22:44

 

 

1970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둔 바튼 아카데미는 들뜬 분위기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휴가를 떠나고 적막해진 학교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기숙사를 떠날 수 없는 학생 몇과 이들을 책임질 고대문명사 선생 폴 허넘, 급식매니저 메리와 경비 대니가 남았다. 바튼의 졸업생이자 고지식한 교사 허넘은 나름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그나마 하나둘 떠나고 반항아 앵거스 털리만이 홀로 남겨진다.  

그리고 펼쳐지는 깐깐한 교사와 문제 학생의 대결과 반목, 이해와 화해라는 클리셰에 바튼 졸업생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아들을 둔 급식 매니저 램의 존재감, 학교를 벗어난 두 번의 짧고 긴 외유를 더하며 영화는 조금씩 서사를 확장한다. 영화가 시작될 때 등장하는 타이틀 텍스트와 디자인부터 영화 전반에 흐르는 포크음악까지 ‘우리 복고풍이야’ 선언한 듯한 작품이어서, 당대를 기억하는 미국 성인 관객이라면 꽤 향수에 젖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나는 한국 관객이므로 탈락.  

배경과 인물과 주요 서사 등에서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영화여서 큰 기대는 없었는데, 캐릭터들의 개성과 디테일한 설정을 통해 상처받은 외강내유의 인물들과 관계의 변화를 적당한 온도와 거리감으로 그려낸 점이 괜찮았다. 남겨졌다가 보스톤으로 떠나는 한국계 학생 예준 캐릭터가 이채로워 ‘1970년 미국 사립학교에 한국계 학생?’ 싶었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의 다양성 요건을 위한 설정이겠지 싶었지만, 미국 영화 속 인종적 다양성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일 테고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한 변화일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메리와 아들을 통해 시대의 아픔까지 과하지 않게 담아낸 점도, 누락됐다면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부분을 환기시켜주는 느낌이었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이 존재하고 수십 년 동안 적지 않은 영화를 본 자로서, 이제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보면서 그 어떤 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한 새로움과 독보적인 감동을 경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휴머니즘 가득한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과 제작진의 고충도 엄청 클 거라는 주제 넘는 생각, 한편으론 텐트폴 무비가 장악하는 산업의 한 귀퉁이에서 이런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게 고맙게도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수십 년간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깊이 남은 작품들은 예전 영화들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이 영화는 내가 느낀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감동을 선사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말이다. 부국제 때 눈여겨보다가 놓쳤는데, 본 걸로 만족이다.  
 

2/10 cgv신촌아트레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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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