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11. 21:21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방금 사건이 일어난 듯 어지러운 공간, 관객이 그 현장을 걷는 것처럼 눈높이와 움직임을 맞춘 카메라가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훑으며 나아간다. 이어 국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서 긍지를 느끼는 일본 전통을 언급하는 독백과 사건 용의자인 장총을 든 청년의 자살, 고요하고 강렬한 인트로는 노인혐오 범죄 관련 뉴스 멘트로 마무리된다.  

미치는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과 함께 숙박업소의 룸 어텐던트로 일한다. 70대 중반의 고령이지만 가족 없이 혼자이기에 생활을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다. 힘에 부치는 일일 수 있지만 아직은 체력이 받쳐주고 세월과 더불어 쌓인 연륜도 있다. 동료들은 일과 중 나누는 점심은 물론 여가 시간에도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관계, 그중 최고 연장자인 이네코는 집에도 왕래하며 가까이 지내는 친밀한 사이다. 

국가는 얼마 전부터 ‘플랜75’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 중이다. 실업과 경제 위기가 고질화되면서 노인을 사회적 비용으로 치부하는 의식이 팽배해지자,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안락사를 진행하는 공공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플랜75 신청자에게는 어떤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10만 엔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시신의 공동 처리에 동의하면 무료 장례를 치러준다. 콜센터에서는 신청 후 예정일 직전까지 주 1회 15분의 전화 돌봄 서비스가 지원되어 외로운 일상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케어해준다. 

히로무는 플랜75 센터의 말단 스태프다. 제도가 궁금해 찾아온 이들을 상담하고, 공공장소의 가판 행사에 나가 무료급식을 제공하며 플랜75를 홍보한다. 대대적인 캠페인처럼 진행되는 가판 행사장에는 ‘주민등록 없어도 신청 가능’ 따위의 배너가 세워져 있고, 삶이 괴로운 이들에게 깔끔한 죽음을 권하는 국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노인과 늙은 노숙인 등 사회가 불필요하다고 잠정적으로 판단한 이들에게, 플랜75는 히로무처럼 예의 바르고 친절한 청년의 얼굴로 다가간다.   

필리핀 출신의 간병인 마리아는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딸의 수술비 마련이 시급하다. 이주노동자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사정을 전해들은 관계자가 모금으로 도움을 주고, 얼마 후 시설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시켜준다. 마리아는 플랜75 센터에서 안락사 당한 이들의 유품을 분류하는 일에 투입된다. 2인 1조의 작업 분위기는 무겁고 조금 전 세상을 뜬 이들의 마지막 소지품을 정리하는 일도 가끔 나오는 고가의 시계나 물품을 눈치껏 챙기는 동료와 시선을 교환하는 일도 착잡하다.   

가성비 좋은 상품을 안내하듯 플랜75를 설명하고 성실하게 신청자를 모집하던 히로무는 센터를 찾아온, 오랫 동안 만난 적 없는 삼촌을 알아본다. 매뉴얼에 따라 담당자에서 배제되지만 삼촌의 집으로 찾아가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히로무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고 안락사된 시신이 폐기물업체를 통해 처리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혼란에 휩싸인다.  

그사이 미치는 일자리를 잃었다. 동료 이네코가 일터에서 쓰러진 후, 숙박업소에서는 손님들이 보기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고령의 룸 어텐던트들을 모두 해고했다. 고령의 미치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던 이네코에게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아 찾아간 집에서는 식탁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둔 시신을 발견했다. 마침 살고 있는 집도 비워줘야 할 처지가 되자 미치는 수순처럼 플랜75를 선택한다.   

플랜75 콜센터의 상담사 요코는 미치의 담당자다. 주 1회 집으로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어느새 마음을 연 미치는 통화를 하며 잊고 지냈던 과거와 지난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편안한 분위기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15분으로 정해진 통화의 종료 알림음이 울리면 현실이 환기된다. 플랜75의 마지막 서비스는 건조한 일상으로 이어온 삶을 마감하려는 마음에 적잖은 울림을 남기고, 미치는 용기 내어 과거 추억이 깃든 볼링장에서의 만남을 요코에게 청한다.  

콜센터 노동자인 요코에게 플랜75 신청자와의 통화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신입을 교육하는 팀장은 통화를 하며 신청자의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유도하라는 팁을 전달하고, 규정을 어기고 미치와 만나 따뜻한 시간을 보낸 후 생겨난 심란함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미치의 안락사 전날 밤, 복받치는 감정을 숨기고 담담한 척 통화를 마친 요코는 끝내 눈물을 쏟는다. 마음의 채비를 마친 듯 통화가 끝난 후 전화기 코드를 뽑아 정리한 미치에게, 요코가 다급하게 거는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진공 상태처럼 느껴지는 플랜75 안락사 병동은 국가가 강권한 삶의 최후를 선택한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에게, 마지막 평온을 선사하듯 고요하고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배웅하는 히로무와 삼촌은 말이 없고, 안내에 따라 동요 없이 침대에 누운 미치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약물이 투여되는 사이 고개를 돌리면, 옆 침대의 주인공이 보인다. 삼촌은 미동 없이 절차에 따라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옅은 경고음에 이은 직원들의 대화, 시간이 흘렀지만 의식이 살아 있는 미치는 무언가의 오작동으로 죽음에 실패했다.  

삼촌을 보낸 후 갈등하던 히로무는 안락사 병동으로 찾아가 삼촌의 시신과 마주한다. 삼촌의 선택을 막을 수 없었지만 시신이 폐기물로 처리되는 것을 알고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히로무는 어렵사리 시신을 빼돌린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마리아가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옮기는 일을 돕고, 히로무는 생전에 그랬던 대로 조수석에 삼촌을 앉히고 긴박하게 화장장을 수배하기 시작한다. 환생이라도 한 듯 병동에서 나와 돌아온 세상에서, 외진 길을 걸어 미치가 닿은 곳에서는 애잔하게 아름다운 석양의 하늘이 펼쳐진다.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상황만을 제시하고 그와 관련한 인물의 생각이나 의견, 선택의 이유 등을 생략하거나 최소한으로 보여주며 전개되는 영화였다. 플랜75를 중심으로 교차되는 주요 인물들의 상징성을 부각하며 디테일을 과감히 건너뛰는 데도 전체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데에 무리가 없었고, 세련되고 유려한 편집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초반 이네코가 쓰러진 후 미치 등이 일 그만둘 때, 콜센터 팀장의 신입 조언을 곁으로 들으며 혼자 밥 먹던 요코가 고개를 들 때의 정면샷은 관객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묻는 듯했다.  

노인, 빈곤, 죽음, 안락사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가난한 노인을 안락사하는 제도 운용이 가능한 디스토피아를 영화는 과잉 없이 보여준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온갖 공간에서 홍보되는 플랜75는 공기처럼 사회를 장악하며 죽음의 기류를 확장한다. 섬세한 운용과 작동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인 빈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게 되는 죽음이라는 별개의 현상을 당위적인 인과관계로 왜곡하는 제도는 저항의 기력을 잃은 가난한 노인을 겨냥하며 모두의 인간성 또한 잠식해간다.  

동료들과 일하고 노래하고, 조카와 반주를 곁들여 식사하는 모습 어디에서도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노인들 그리고 가난한 노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정책이 마련한 일자리에서 마음을 다해 성실하고 친절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회초년생 청년들의 대비는 섬뜩했고 현실적인 박진감이 무겁고 두렵게 느껴졌다. 이미 돈이 전부라는 가치관이 팽배한 세상에서 만약 그런 제도가 입안되고 지속된다면 그 속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나 젊은이 역시 자신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울 테고 결국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상식이 되고 말 것 같다.  

부국제 때 놓쳤는데, 설 연휴 부모님 댁에 머물던 서울에서 시간이 맞아 볼 수 있었다. 소개를 통해 내용을 대략 알고 있던 터여서 고령인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며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는데, 영화 마지막에 대상 연령을 65세로 낮추는 걸 검토한다는 뉴스 멘트를 생각하면 나이 들어가는 누구에게도 무관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 깊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안락사나 조력 자살에 찬성하는 편인데, 경제적 생산성을 잃은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인식의 결과로서 이런 미래가 닥친다면 인류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겠다 싶어 소름이 끼쳤다. 너무 잘 만든 영화의 무서움을 느꼈다. 


2/10 cgv신촌아트레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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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