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6. 19:19

 

 

유명작가 산드라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 한 대학생이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다. 여유롭게 시작된 인터뷰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중단된다. 다음을 기약하고 대학생이 떠난 후,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은 안내견 스눕과 함께 산책에 나선다. 이들이 산책에서 돌아온 집 앞에는 아빠 사뮈엘이 피 흘린 채 쓰러져 있고, 목격자 없이 추락한 사뮈엘의 사망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다. 

도입부에서 주요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 영화는 추락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과거와 각자의 비밀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남편의 추락과 사망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산드라는 변호사 뱅상을 선임해 재판을 준비한다. 알리바이와 무죄 증명을 위해 뱅상과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니엘이 사고로 시각을 잃은 후 부부 사이에 일기 시작한 균열과 도시를 떠나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한 후에도 악화되기만 한 관계다. 

작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산드라와 달리 지지부진한 가운데 우울증에 시달리며 이사한 집의 수리에 매진하던 사뮈엘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것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달래고 표출해왔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마찬가지였고, 같은 집 안 각자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며 남처럼 생활하던 부부는 생사가 갈린 채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놓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모두의 시선은 산드라에게 쏠린다. 검사는 다양한 증인을 소환하고 증거를 수집해 집요하게 산드라를 공격한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과거와 사생활과 성적 지향 혹은 일탈 등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사건 직전 있었던 부부싸움의 녹취파일이 발견되면서 산드라는 궁지에 몰린다. 아동 보호와 재판의 객관성을 위해 법원에서 직원이 파견되지만, 갑작스런 아빠의 죽음으로 충격 받은 다니엘에게도 이러한 사실은 거의 여과 없이 전달된다. 

시종일관 관객의 긴장과 몰입을 놓치지 않는 영화는 차가운 집과 뜨거운 법원을 오가며, 법정 공방이라는 진실게임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맥락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현상과 이면에 늘 존재하는 간극과 누구에게나 유효한 자기만의 진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 잠재된 엄청난 빈틈과 논리적 추론으로 파고들 때 생겨나는 수많은 함정, 발언권을 가진 자가 가정과 추측을 밀어붙일 때 발생하는 확신의 오류와 그 반복이 타자에게 미치는 영향, 재판 과정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필요 이상의 가혹함과 잔인함 같은 것들.  

이 모든 지난함과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증언해야 하는 불리한 룰을 뚫고 산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어떻게”로 알 수 없으면 “왜”라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인 진술 그리고 “남 돌보는 거에 지치고 피곤할 때 됐어”라며 스눕에 투사해 자신의 내면을 토로했던 사뮈엘의 상황 등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극적 연출 없이 무죄를 보여준 영화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녁 식사와 축하주를 나누는 자리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를 숨기지 않는다. 산드라 캐릭터의 독특성일 수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모종의 암시일 수도, 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민감하게 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법정에서의 선명한 결말에도 영화는 법리적 판결과 별개로 남을 수밖에 없는 진실의 문제를 지우지 않는다. 표절과 외도에 대한 사뮈엘의 주장이 회복 불가능한 갈등에서 깊어진 피해의식과 질투에 기인한 것이라도 무의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뮈엘의 강박을 냉철하고 자신만만한 산드라가 황당한 억측이자 자기연민으로 무시했대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다니엘에게 산드라는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엄마이자 미지의 괴물로 그림자를 남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두 줄로 요약 가능한 사건에서 여러 갈래의 생각을 끌어내는 영화였는데, 냉담하고 침착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여운을 남기는 주인공 산드라 휠러의 정제된 연기 덕이 컸던 것 같다. 나오는 줄 몰랐는데 [신의 은총으로]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스완 아를로드, 변호사 뱅상의 존재가 반가웠다. 하나의 사건을 향한 여럿의 관점이 경합하는 가운데 현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망하며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환기하는 작품이었다.  


2/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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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