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6. 18:18

 

 

근대적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그 시대 복장을 한 하인과 나체의 여인과 한 공간에 있는 제인 버킨의 모습이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것 같다. 런던에서 서른을 맞던 날을 회상하는 인터뷰의 배경이기도 한데, 같은 장소에서 역할과 포즈가 바뀌고 마흔의 생일을 앞둔 제인 버킨의 인터뷰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작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미장센은 마네의 “올랭피아” 패러디였는데, 추앙되지만 함부로 취급되는 여성과 그 극단에 선 여성 스타의 이미지 그리고 직관적으로 보이는 것과 사실 혹은 실제의 차이를 복합적으로 상징하는 선택일까 싶었다.   

영화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내용과 형식으로 제인 버킨의 다양한 모습과 이야기를 담아낸다. 다큐와 인터뷰, 일부 흑백을 포함한 극영화의 여러 시퀀스와 에피소드, 신화와 예술 작품에서 차용한 상징적인 이미지화, 감독과의 대화와 메이킹까지 아우르는 장면들이 어지럽게 이어진다.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연쇄와 전환 속에는 제인 버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아녜스 바르다의 욕망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 제인 버킨의 유명인이고 싶지만 무명인이고도 싶은 욕망이 교차한다. 감독은 어떤 힌트처럼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를 화면에 던져둔 것 같았지만 보면서 솔직히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무지에 기인한 감상이겠지만 당황스럽거나 조잡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아 몰입이 어려웠고 후반부에 타잔과 제인, 잔 다르크로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실소와 함께 졌다는 마음이 됐다. 제인이라면 타잔의 제인보다 다른 제인이라며 그를 언급하고 그에 따른 영상이 나오고, 잔 다르크를 언급하며 자신의 프랑스어 억양 때문에 어렵겠지만 마지막 장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말에 이어 조야한 화형 장면 연출되는 부분이 특히 압권이었다. 어린 소년과의 로맨스 로망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감독의 어린 아들이 언급되는 부분도 약간 놀라웠는데, 찾아보니 이 부분은 이후에 두 사람이 출연한 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영화에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연결된 이미지나 인물만이 아니라 결혼과 아이들 등 실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 남편 세르주 갱스부르와의 노래 녹음과 후의 공연 장면 등도 등장한다. 촬영 기간은 알 수 없지만 1988년에 발표된 영화라고 하니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중년의 길목에 막 들어선 제인 버킨의 ‘공적’ 삶의 시간을 아녜스 바르다의 주관적 시선으로 망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캐릭터와 분장과 의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얼굴 표정과 연기를 펼치는 제인 버킨은 매력적이었지만 그의 전성기를 동시대인으로 지켜본 적 없는 자로서는 사실 좀 불감당이었다.  

제인과의 대화를 통해 영상으로 구현되고 의미를 얻는 이야기들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대체로 산만하고 장황한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감독은 하고 싶은 거 다한 것 같고, 관객은 그리스 신화와 서양 미술, 영화 역사에 대한 지식 및 감독의 예술관에 대한 선이해를 갖춰야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나이 먹으면서 사람 생각하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영화를 만나면 예술가의 사유를 따라가는 건 역시 어렵구나, 멈칫하게 된다. 오전 10시 10분 영화를 보는 건 게으른 자로서 나름 큰 결심과 시도였건만, 내게도 작품에도 아쉬웠다.  



2/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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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