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의 외유를 마치고 통영행 버스에 탔다. 날은 덥고 몸은 늙어 체력이 받쳐줄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양호한 상태, 근육통과 불면 예방을 위해 매일 챙겨먹은 애드빌pm에 영광을 돌린다. 간만의 장기 외유, 일찌감치 가방을 대충 싸두었지만 당일 출발 전에 정리해야 할 것들도 있어 일요일 아침부터 바빴다. 오랜만에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짜증이 났고 환승을 통해 늦지 않게 터미널에 닿았다. 고성과 배둔, 마산을 거쳐 당도한 서부정류장, 환영한다는 듯 온몸을 감싸안는 뜨거운 열기로 대구를 실감했다.
지하철과 지상철을 갈아타고 사촌네 도착, 짐만 놓고 시내로 나가 놀다가 저녁에 영화를 보기로 하였으나 숨막히는 날씨 덕분에 배달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짜장면과 짬뽕과 탕수육, 혼자서는 먹을 일 없고 얼마 전 몰아본 유튜브 [오늘도 삽질] 덕분에 생각난 음식이었다. 간만에 기름진 음식 실컷 먹고 수다를 떨다가 집을 나섰다. 지상철과 지하철을 갈아타고 반월당역에 내려 지하상가를 걷는데 센트럴시티와 이어지는 고속터미널역사와 비슷해 서울 생각이 났다. 남아도는 cgv쿠폰 소진 겸, 사촌은 못보았고 나는 한 번 더 볼 의향이 있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대사에 복선과 암시가 많고 씬간의 유기적인 밀도가 높은 영화라고 느꼈는데, 두 번째 보니 처음 볼 때 놓쳤던 것들이 보여서 재미있었고 얼마 전 주문해둔 각본집을 너무 늦지 않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지하철역 다이소에 들렀다. 몇 년 전 여름 서울에 온 사촌과 며칠을 행군하듯 돌아다니며 더위에 지칠 때마다 다이소에 들렀던 기억이 났다. 사촌이 시원하게 쏘겠다며 다 고르라고 했지만 제천과 부산을 거쳐야 하는 입장이라 이성적으로 차량용 블루투스 수신기와 다용도 케이블, 성에방지용 안경닦이 정도로 타협했다. 포장해온 치킨을 늦은 저녁 겸 야식으로 먹고 수다를 떨다가 잠들었는데, 체감상 서울 떠난 후 뭔가를 가장 많이 먹은 날인 것 같다. 작은 이모는 이 나이에도 만날 때마다 용돈을 주시는데 민망한 일이라, 이번엔 알리지 않고 다녀갈 생각이었지만 실패했다. 다음 날 아침 카페에 오신 작은 이모는 변함없이 용돈을 주셨고 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주신다는 걸 만류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사촌이 준비해준 아보카도 브런치를 든든히 먹고 나와 동대구복합터미널 도착, 정류장 차양에서 드라이아이스가 내리는 진풍경을 처음 보았다.
제천행 버스는 한산했다. 터미널에 내려 제천역 앞 숙소까지 가는 길 곳곳에는 JIMFF를 새긴 표석과 현수막이 즐비했고 곳곳에 배너가 흩날렸지만 축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통영만큼이나 퇴락한 소도시 풍경이 이어졌고 단돈 2만 5천 원에 예약한 '미니온돌' 숙소에서 그런 느낌은 정점에 닿았다. 싼 숙소 전문 숙박자로서도 놀라울 만큼 작은 방이었는데, 축제를 즐기러 온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위로를 전해준 뮤지션을 애도하기 위한 1박에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짐을 놓고 잠시 숨을 돌리고 공연이 열리는 하소생활문화센터까지 산책 겸 걸었다. 공연 전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백현진 님과 김오키 님 등 뮤지션들을 보았고 생기발랄하고 젊은 영화제 자원활동가들의 응대에 약간의 이물감을 느꼈고 생각보다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과 무대가 쓸쓸하다고 느꼈다. 다큐 상영과 공연, 대담으로 채워진 시간은 2시간을 꽉 채웠고 통영에서 문득 떠올라 예매했던 8시 영화를 미리 취소한 건 잘한 일이었다.
방준석 님을 기억하는 두 시간의 여운에 마음을 기대어 다시 걸었다. 어둠이 내린 낯선 거리는 대체로 음산한 느낌이었다. 물성이 더 깊은 기억을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모바일이 아닌 종이 티켓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메가박스에 들렀지만 시간이 늦었다. 다음 날 다시 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도착한 숙소는 여전히 신산스러웠고, 살면서 머물렀던 가장 작은 공간이었다.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응답하라 1988] 1회와 2회를 보고 새벽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잘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심신이 불편했던 탓인지 일찍 일어나 미션이라도 수행하듯 메가박스제천으로 향했는데, 폐막식날이어선지 티켓부스는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오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제천, JIMMF는 오롯이 방준석 님을 기억하는 것으로 단정하게 마무리됐다.
제천에서 부산까지 가는 버스는 영주와 옹천, 안동을 경유했다. 버스가 울산을 지날 즈음 뒷자리에서 "아, 클났다."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제천행 버스에 오르기 전 애드빌pm을 먹고 푹 잠든 터라 뒤에 누가 탔는지도 몰랐는데, 뒤에서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돌아보니 한 어린이가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고, 울산행 버스를 타야 하는데 부산행을 잘못 탄 모양이었다. 전화기를 건네받고 검색해보니 동부산터미널 도착 20분쯤 후에 출발하는 울산행 버스가 있었다. 조금 후 어린이의 엄마에게 전화가 와서 말씀드리고 함께 티켓을 사고 버스를 태워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부산에 도착해 어린이와 함께 티켓을 사고 엄마와 소통하며 버스가 출발하는 것까지 보고 사진을 보내드렸다. 얼마 후 엄마가 고맙다며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보내셨는데 좀 난감했지만 받는 게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도 같아서 나 역시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일인데 너무 고마워하셔서 약간 의아하기도 하고, 그랬다.
부산은 비가 많이 내렸다. 예약한 숙소 카운터에 가방을 맡겨두고 cgv서면에 가서 세 편의 영화를 이어 보았다. 버스에서 푹 잔 덕에 피곤하지 않았고 첫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가 생각보다 무척 재미있고 유쾌해서 시작이 상쾌했다. 궁금했던 [썸머 필름을 타고]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다음 영화인 [보일링 포인트]도 몰입감이 상당하고 매력적인 영화여서 숙소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운 좋게 예매한 숙소는 전날에 비하면 과할 만큼 넓고 쾌적했다. 자정이 다 되어 체크인했는데 객실 에어컨을 미리 켜두신 섬세함이 감동이었다. 큰 화면으로 코보컵 재방송을 보다가 잠들었고 다음 날은 느긋하게 나와 알라딘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영화관으로 갔다. [멋진 세계]는 기대보다 훨씬 멋졌고, 이번의 유일한 art 2관 관람작인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생각보다 많이 좋지는 않았다. [뱅크시]도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통영행 막차는 밤 10시이지만 다음 날 출근이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기로 했고, 5시 56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바쁘게 돌아다녔는데 약간 멍한 기분, 차차 기록하며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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