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알리바이2022. 9. 11. 21:21



설연휴 이후 오랜만에 부모님댁에 다녀왔다. 통영 이주 이후 명절에는 보통 연휴 초반에 책 모임을 잡아서 지인의 집에 하루이틀 있다가 부모님댁으로 갔었는데, 실은 이래저래 서로 번거로운 일이어서 그만해야겠다고 지난 설에 마음먹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부모님댁 다이렉트, 10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느라 제법 일찍 일어나 마지막 과자를 먹고 목욕재계하고 집을 나섰다. 남부터미널행 중에 일반 가격으로 우등버스를 탈 수 있는 경우가 있어서 고성을 경유하지만 서울 갈 때 가끔 탔었는데, 시간이 흐른 만큼 늙은 탓인지 그러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무려 프리미엄버스. 예전 속초 여행 때 처음 타보고 무척 사랑하게 되었는데, 운행한 지 좀 되어서인지 내부에 세월의 때가 적지 않았지만 쾌적함과 편안함은 여전했다. 고속터미널행은 도로 사정이 좋으면 4시간이 채 안 걸릴 때도 있어서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출발 1시간쯤 지나 버스가 40분가량 제자리에 있었다. 갓길로 119 구급차며 견인차가 많이 지나갔고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5분 넘게 달려서야 저 앞 어딘가에서 4중추돌 사고가 났다는 걸 알았다. 차 두 대는 많이 찌그러졌고 두 대는 양호했고, 갓길에 사람들도 십여 명 있었는데 검색해도 뉴스에는 안 나오는 걸 보면 중상자는 없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사고 덕분에 예상보다 40분쯤 더 버스에 머물렀지만 편한 자세로 이어폰 연결해 이것저것 보면서 가느라 별로 힘들지 않았다. 3시 넘어 부모님댁에 도착해서 먼저 와 있던 오빠네 가족들이랑 피자 먹고 몇 가지 전을 부치고 집어 먹고 하다 보니 저녁 시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오빠네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엄마방에서 뒹굴거리며 텔레비전 보다가 자정 전에 잠들었다. 추석날 아침에 오빠네 가족들이 다시 와서 같이 아침 먹고 그들은 외가에 가기 위해 돌아가고, 나는 고대했던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행! 문 닫는다는 소식이 있었던 터라 아트하우스관이 두 개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계속 운영된다는 게 반가웠고, 작년 설날 이후 처음이라 괜히 마음이 설렜다. 버스에서 내려 길 건너 건물을 보니 마지막에 봤던 그대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많이 좋아하는 영화라 반갑기는 했지만 빛바랜 걸 보니 흐른 시간이 느껴졌다. 유니클로 매장이 사라지고 상당 부분 비어 있는 듯 보이는 건물이 여전한 코로나19 여파를 증언하는 것 같기도 해서 안타까웠지만,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11층에 붙어 있던 커다란 [마티아스와 막심] 스틸컷이 아직 있을지 궁금했는데, 마치 지금 상영 중인 것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도 여기에 오게 될 날은 설날이나 추석 정도일 텐데, 언젠가는 바뀌겠지만 이왕 관리 안 하는 거면 가급적 오래오래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싶어졌다.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시간도 알맞게 줄줄이 상영 중이어서 네 편을 예매했다. 장거리 이동과 바뀐 잠자리 때문인지 중간에 조금 피곤을 느끼기도 했지만, 9월 하순에나 부산에 갈 예정이기 때문에 오늘이 아니라면 놓치게 될 것 같아 취소의 유혹을 떨치고 네 편을 모두 보았다. 다행히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말고는 러닝타임이 1시간 30분 내외로 짧은 편이어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기대만큼 좋았던 영화는 [풀타임], 나머지는 대략 쏘쏘하거나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어서 아쉬웠다. 지난 설날에도 영화를 세 편 보았고 그중 한 편이 너무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는데 이번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간만에 부모님댁에 와서 집에 안 있고 혼자 놀러나온 벌인가 싶은 마음이 잠시 들었고... 까맣게 잊고 있던 작년 최악의 영화 중 한 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어떤 영화도 제작진과 출연진의 상당한 노력과 정성과 협력의 결과물일 것이므로 제목은 생략. 암튼 대략 8시간을 극장에 머물며 사이의 여유 시간에는 10층 엘리베이터 옆 테이블바에 앉아 잠시 바깥 구경을 했는데, 맞은 편의 명동과 남산타워 풍경을 보니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실은 아직도 투쟁 중일 근거리의 세종호텔 노동조합에 생각이 미치기도 했는데, 농성 상황을 잘 모르고 추석 당일이어서 아무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생각만 하다가 말았다. 영화를 다 본 후에는 다시 부모님댁으로, 버스 환승하느라 숭례문 버스정류장에 잠시 내렸는데 스마트 뭐시기 어쩌고 시범정류장이라며 아주 세련되고 쾌적하게 되어 있어서 새삼 지방소도시민으로서 대도시에 대한 거리감을 느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기도 했고 멀리 살다보니 접촉면이 줄기도 해서 부모님과 감정이 상할 일은 없는 편인데, 추석 전날 엄마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내가 생각할 때 우리 엄마는 매우 너그럽고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세대와 직업, 출신 지역의 특성으로 인한 가부장적 가치관과 세계의 변화에 대한 몰이해, 수구적인 정치 성향은 개인의 특징이나 한계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런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나로서는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 내가 항상 옳은 건 당연히 아니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이야기들이 없지 않은데... 아무려나 추석 전날 저녁 식탁에서 음식 준비를 마무리하며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고 인내심이라고는 없는 나는 잔뜩 싸가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부모든 선생이든 연장자든 누군가를 핸들링하려는 상황이 너무 싫은 나머지 순간 욱한 거였는데, 엄마가 참으면서 그냥 넘어간 셈이 되었지만 내내 마음에 걸리고 후회가 됐다. 누군가를 핸들링하려는 상황이 싫다는 이유로 나 역시 그 순간 나쁜 표정과 단호한 말로 엄마를 핸들링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성숙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어서 영화를 보는 중에도 이따금 그 상황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고 집에 오니 저녁 9시 30분, 밥도 안 먹고 영화만 보냐며 스콘을 챙겨주었던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잡채 재료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가 해준 잡채를 뻔뻔하고 맛있게 먹으며 내심 전날의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기가 어색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엄마가 싸준 음식과 물건 들을 바리바리 챙겨 11시 반쯤 부모님댁을 나섰다. 내 캐리어를 끌며 지하철역까지 함께 온 엄마는 고속터미널까지도 갈 기세였는데,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52시간의 봉인을 해제하고 과자를 먹어야 하므로 강력 고사하여 플랫폼에서 작별을 고했다. 프리미엄버스는 역시 쾌적했고 쌩쌩 달려 3시간 55분만에 통영터미널 도착, 짐이 많아 택시를 타려고 했으나 집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곧 온다기에 알뜰하게 집으로 왔다. 2박 3일만에 돌아온 집은 역시나 최고였고, 엄청 많은 음식들을 적당히 소분해 냉동실과 냉장실에 욱여넣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마음과 달리 다정하고 따뜻한 말이 나오지 않는 터라,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닌데 연휴 내내 새벽 6시에 일어나 이런저런 음식을 장만하고 먹이고 싸보내느라 고생한 엄마에게도 쉽지 않다. 추석 전날의 무례도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먼저 말 꺼내기 민망해서 연휴에 무리해서 아픈 거 아니냐고 날리듯 겨우 한 마디했는데 엄마가 "아픈 건 그날 밤에 아팠다"며 그 얘기를 살짝 꺼낸 덕분에 이야기하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새삼 엄마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강력하고도 도저하게 나라면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곁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배부른 짓거리일 거라는 생각도. 9월 9일 오전 8시경부터 11일 정오경까지 약 52시간 과자와의 결별은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예우와 인내였다. 엄마한테는 참, 언제나, 여러모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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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