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12. 29. 15:59

 

 

책날개에 실린 짧은 저자 소개의 첫 문장은 ‘전문 부랑자이자 히치하이커, 사회부적응자.’ 그리고 저자는 동물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아나키 예술가로 현재 한국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책에는 2014년 12월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 6년 동안 수많은 나라를 방랑하며 경험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세계를 유랑하며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동료들을 만나고 낯설고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는 순간도 있지만, 어디에든 존재하는 모순과 폭력을 마주하고 고민하며 행동했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수중의 물건들을 처분하고 몇 년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500만 원이 떠날 때 가진 전부. 그러나 오랫동안 세계를 유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본주의 시스템 밖의 네트워크와 그에 참여하는 이들의 연대와 호의 덕분이었다. 침낭과 텐트로 숙박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카우치서핑’, 살림이나 아이 돌보기 등 일정 시간 노동을 제공하고 숙식을 제공받는 ‘워커웨이’, 과거의 낭만이거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흔히 여겨지는 ‘히치하이킹’, 대형 마트나 상점에서 버려지는 쓰레기통 속에서 음식을 구하는 ‘덤스터다이빙’ 등을 새롭게 알게 되거나 직접 체험하면서 유랑은 좀 더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해진다.

 

저자는 수많은 타인들에게서 갖가지 생존의 기술을 공유 받으며 그들과 친구가 된다. 특별한 인연이 더해진 이들과는 기꺼이 가족이 되기도 한다. 유럽의 곳곳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목도하고 그들을 돕는 활동가들과 함께한다. 안전할 거라는 믿음으로 입국한 런던 공항에서 영문을 모른 채 억류되면서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곧 잘못이 되는 세계를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각종 워크숍에 참여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음악을 연주하며 거리 공연을 하고, 직접 촬영한 영상들을 편집해 영화를 만든다. 여러 레인보우 개더링에서 문명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지만, 내부의 성폭력에 침묵하는 방관이 곧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스라엘의 레인보우 개더링에서 만난 길라드의 매직하우스에서 일어난 성폭력을 온라인에서 공론화해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활동을 주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여행은 수많은 생명들을 만나 감응하고 변화하는 과정이다. 국적과 성별, 권력 여부에 따라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문화와 제도가 동물을 고기로만 대상화하는 축산업과 연결되고, 축산 동물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며 저자는 동물의 살, 젖, 알을 먹지 않음은 물론, 동물 해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포틀랜드,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캘리포니아 등 미국 각지에서 저자는 여러 동물권 활동가들과 함께 시위와 집중행동 그리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의 존재를 기록하는 ‘비질’ 등에 참여한다. 거대 축산업의 폭력성뿐 아니라 낙농과 양봉 등 ‘인도적인 착취’와 육식에 대해서도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저자의 이후 여정은 이전보다 조금 더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한 스쾃 캠프에서 비건식을 기본으로 선택적으로 제공되는 치즈를 문제 삼았다가 묵살당하고,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 강간과 홀로코스트 등의 단어를 사용한 신문을 제작하려 했다가 제지당하기도 한다. (저자가 반례로 서술한 ‘토끼몰이’나 ‘새우꺾기’ 등 인간의 억압을 동물에 비유한 표현은 인권운동 진영에서도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던 것들이어서, 읽으며 뜨끔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를 바 없는 권리의 주체라는 인식,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한 시선과 심정으로 여행하면서 저자는 예기치 못했던 반발과 충돌을 겪게 되지만, 여성이자 외국인이며 약자이고 피해자인 자신의 ‘당사자의 경험권력’을 인식하고 그 ‘특권’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저자의 ‘특권’은 인간이 정한 생명의 위계 말단에 놓인, 산업이라는 명목으로 고통과 학살이 당연시되는 축산 동물의 해방을 위한 활동으로 더욱 집중된다. 한국에 입국해 축산업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동물권 직접행동에 참여하며 방문한 외딴 곳들에서 저자는 참기 어려운 죽음의 냄새를 호흡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주목한다. 대만 공동체에서는 생추어리에서 생활하면서 세심하게 돌보지 못해 떠나보낸 동물 친구를, 불의의 사고를 당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간 친구 안드레아를 추모하며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 “만약 언젠가 본인의 육체가 작동을 멈춘다면 그것은 영혼의 해방이니 부디 슬퍼하지 말라는, 모닥불을 피우고 춤추고 노래하며 각자의 삶을 축복하는 자리를 가졌으면 한다.” 고인이 언젠가 유언처럼 남겼다는 말이, 이 깊은 여행기가 닿고자 하는 삶의 이유처럼 느껴졌다.   

 

[0원으로 사는 삶]의 양가적인 여운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흥미롭게 따라가다가 영적인 부분이 유독 강조되어 중반부 이후 거부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가끔 떠올랐고, 어쩌면 유사한 여행을 경험했을 다른 이의 이야기가 살짝 궁금해졌다. 내 인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질문을 던지는 책 읽기를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읽은 것보다 더 많은 믿음을 주는 고병권의 추천사에 결정적으로 혹하고 말았다. 본문에 앞서 추천사들이 나오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데, 고병권과 홍은전이어서, [사회적응 거부선언]이라는 단호한 제목에 “학살의 시대를 사는 법”이라는 더 강경한 부제가 붙은 책으로 들어가는 마중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미리 살펴본 책 소개만으로도 독특한 개성과 엄청난 감수성의 소유자로 짐작됐던 저자의 문체는 간결하고 담담했다. 자신의 깨달음과 변화를 강조하거나 그에 대한 주장을 펼치기보다, 지금과는 달랐던 이전의 모습을 포함한 실수와 미진함까지 진솔하게 기록하면서 점진적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동물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인식하게 된 특별한 경험 이후 ‘마리’가 아닌 ‘명’이라는 단위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포틀랜드에서의 피임기구 시술과 관련한 저자의 감정과 서술에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미국의 동물권 활동과 사회적 진전 지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동물과 인간을 수평선상에 놓고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인식에 대한 거리감을 희석시켜주는 측면도 있었다.

 

본문이 끝난 후 마지막 두 쪽에 걸쳐 단호한 선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우리가 가담하고 있는 대학살을 돌아보며 / 후회하고 부끄러워할 날은, 반드시 온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간 책장의 끝에서,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을지 모르겠다. 작고 하얀데 크고 센 책, 솔직히 이런 책을 읽으면 괴롭다. 일차원적으로 말하자면, 당장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고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님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당장 결심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럽기 때문에. 그럼에도 새해에는 적어도 내가 직접 육류를 사먹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얍씰하고 은은한 마음은 먹었다. 같은 세계의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전언을 이따금 읽으며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유를, 언젠가는 용기 있게 직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하루
2023.6.23초판1쇄발행, 온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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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