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1. 9. 23:32

 

 

책에서 다룬 열 편의 영화 중 고작 두 편을 봤을 뿐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영화는 줄거리’ 주의자로서 엄청난 스타일리스트인 웨스 앤더슨의 존재와 영화는 오랫동안 관심 밖이었다. 뒤늦게 기획전인지 재개봉이었는지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왜 이제서야? 생각했고 이후 반가운 마음으로, 게다가 티모시 샬라메까지 출연한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는 솔직히 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듯 말 듯했다. 지난해 개봉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내려놓은 마음으로 즐겁게 감상하다가 무방비상태에서 훅 들어온 에디 아놀드의 “캐틀 콜”에 무장해제, [아이다호]가 아닌 영화에 흐르는 그 노래가 썩 잘 어울려서 고마워졌다. 

책은 웨스 앤더슨이 발표한 장편 영화를 순서대로 따라가며, 그야말로 영화와 삶을 아우른다. “아이코닉 필름 메이커” 시리즈의 하나라고 하는데, 인터뷰 출처만 7쪽에 이를 만큼(페이지 여백이 많긴 하지만) 저자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성실하게 집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 깐깐하고 편집증적인 외곬수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던 웨스 앤더슨의 여러 면모들과 대략적이지만 영화 작업의 과정들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데뷔작부터 헐리우드의 기성 스튜디오와 함께했지만 커다란 흥행 수익을 얻는 경우는 없었음에도 자신만의 개성과 색깔을 고수하며 영화 작업을 지속한 비결은 물론 독보적인 재능과 노력에 기인하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열광하던 문화적 요소와 영웅 들을 차례차례 영화로 풀어낸 이력은 순정의 승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따로 또 같이 작업을 이어가는 오웰 윌슨을 비롯해, ‘사단’이라고 불릴 만큼 그와 반복적으로 작업하는 혹은 새로 합류한 영화인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재미있었고 특히 빌 머레이의 에피소드는 좀 감동이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작업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물론 웨스 앤더슨 영화의 독특한 개성과 매력과 완성도 등 영화적인 부분도 크겠지만, 인간으로서의 다정함 같은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의 영화들이 지향하는 가족, 낭만, 동심 등이 단순한 과거 지향이나 향수를 넘어 정제되고 세련된 스타일을 통해 새로운 감성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인간미에도 기인하는 게 아닐까 싶고 말이다. 그의 오랜 작업 파트너인 로만 코폴라가 했다는 “웨스 앤더슨은 사회적 동물입니다”에서 빵 터졌다가, [다즐링 주식회사] 부분에 등장하는 그의 말 “감독은 혼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영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생겨나는 새로운 혼란을 창조하는 겁니다.”라는 말에서 다시 존경스러워졌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영화 관련 책들 중에 문체나 편집의 문제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를 좀 경험했었는데, 이 책은 독보적으로 잘 읽히고 사진들도 훌륭하고 전반적으로 신경 많이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트로’를 제외하면 목차 자체가 작업한 장편 영화의 제목이자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표 시기가 1990년대 중반부터 25년에 이르고, 그 영화들이 착안된 시점과 개인사적인 부분들 그리고 당대의 감독들과 작품들, 당시의 헐리우드 분위기와 상황 등까지 자칫 장황해질 수 있는 스토리가 정말 읽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어릴 적 좋아했지만 잊고 있었던 이름들을 마주하며 반가웠고,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비주얼 모티브 가이드, 핵심 배우들, 독특한 장치들, 영향을 준 예술가들의 목록’ 등 한 쪽의 요약 박스도 성의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즐겁게 읽다가 막바지로 갈수록 눈에 띄는 표기 실수가 살짝 반복되고 179쪽에서는 사진 설명 위치 오류까지 발견되어 아쉬웠지만, 책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그래도 좀은 아쉽다. 


이안 네이선•윤철희 옮김
2023.8.23초판1쇄, (주)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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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