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 윤이상 선생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는 것은 동백림 사건과 이후 그가 재독 한국인으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한편 세계가 인정한 현대 음악계의 거장이었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의 음악에 대한 가치가 폄하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학창 시절 학생회실 구석에 있던 윤정모님의 '나비의 꿈'을 대강 넘겨보다가 말았던 기억, 사후 어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속에서의 베토벤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다소 무거운 인상을 한 그의 얼굴, 일생 그의 마음의 고향이었다는 통영의 푸른 앞바다가 떠오른다. '광주여 영원히'나 '심청' 같은 대표작의 제목만 들어보았을 뿐 제대로 그의 음악을 감상해 볼 기회가 없었고, 현대 음악가로서의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체감해 볼 수는 더욱 없었다.
'상처 입은 세기의 거장'이라는 다소 고답적이지만 매우 적절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윤이상 선생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와 그에 의존한 피상적 호감만을 가지고 있던 내게 참 고마운 느낌이었다. 현대의 인물임에도 실제 사진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어린이 도서답게 소박하고 예쁜 그림과 함께 중요한 사건과 개념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주석, 다소 도식적인 위인전의 딱딱함을 상쇄시켜주는 성의어린 편집 등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인물을 미화하고 업적을 찬미하는 위인전의 오류를 탈피하고자하는 작가의 노력은, 윤이상 선생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가족적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이어져 그의 삶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비범하게 나고난 음악적 재능보다 가슴이 따스하고 삶의 범주가 넓은, 그러면서도 떠날 수 없는 열정과 사랑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완성해갔던 의지적 인간 윤이상 선생의 이야기는 때로 가슴이 뛰고 때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선사해준다.
윤이상 선생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이미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가장이 된 나이 마흔 즈음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탓이기도 했지만 거장의 반열에 오른 대부분의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청년의 책임을 온전히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통영과 부산에서 보낸 이삼십대 시절의 이야기는 내게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유럽에서의 음악적 성공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뒤에도 그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직접 나서서 모임을 조직하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동백림 사건이 있은 이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양심의 길을 따라 행동했으며 건강이 악화되어 활동이 부자연스러울 때에도 범민련의 초대 의장직을 기꺼이 맡았다. 두 개로 나뉘어진 조국을 가슴에 끌어안고 윤이상 선생은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코스모폴리탄의 치열함을 보여줬다. 그를 잘 몰랐던 내게 그의 삶은 감동을 넘어 경이로움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그의 조국이며 또한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속속들이 왜곡되고 뒤틀어진 역사인지를 새삼 느끼며 소름이 끼쳤고, 옳은 것과 바른 것에 대한 올바른 시선을 견지하려는 이런 책들이 아이들에게 읽혀진다면 나중의 우리 나라는 조금 나아질까 하는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송두율 교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경계도시'의 후반부에 선생의 묘소를 찾아간 장면이 나온다. 송두율 교수 또한 분야는 다르되 윤이상 선생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개의 조국을 끌어안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으로부터 외면 받는 해외파 인사다. 여전히 그분들 이외에도 조국이 버린 수십 분의 애국자들이 해외 곳곳에서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까지 때늦은 안타까움으로 이런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려야할까. 얘기가 조금 번졌는데,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슴 아프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이런 이야기들이 널리 읽혀지고 윤이상 선생님 같은 어른을 존경하는 위인으로 가슴에 새기며 자라는 아이들이 생겨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2003-07-06 21:11,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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