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과 가수 이지상, 소풍 가는 날이 함께 한 <사람을 위한 노래, 사람과 함께 하는 이야기>라는 소박한 제목의 공연이 창천교회에서 열렸다. 오창익 국장의 인권 이야기와 진행으로, 무대에 오른 가수들도 자신만의 인권 이야기 들려주고 사람이 담긴 노래를 불렀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 정도의 교과서적인 답변 외에 잘 떠오르는 것이 없지만, 인권은 길지 않은 시간에 노래로 불리고 공연으로 기획될 만큼의 보편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인기있는 단어가 된 것도 같다. 물론 어디에서도 환영받는 말이 된 만큼 가벼워지고 너도 나도 인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상할 만큼 그럴 듯한 수식어가 되어버린 느낌도 없지는 않지만.
요즘 자신의 화두라며 가수 이지상님은 효율성과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모 단체에서 주관한 친선 축구경기에서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어울리며 느꼈던 바 라며, 전혀 불편 없이 쉽게 늘어놓는 자신의 수많은 말들과 수없이 몸을 뒤틀고 고개를 가로 저어야만 겨우 하고픈 한두 마디를 내뱉을 수 있는 그들의 말. 그라운드를 누비며 '수비수 홍명보가 빤스를 잡아당길 만큼'(이지상님에 대해서는 항간에 축구인 중 가장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한다, 축구 잘한다는 경험에 근거한 자기 자랑이었다.ㅎㅎ) 힘차게 뛰고 공을 찰 수 있는 자신이 아무 의식없이 내딛는 발걸음들과 단 한 발자국을 옮기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그들의 걸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효율성의 잣대로는 거의 무의미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한두 마디 말과 단 한 걸음에 담긴 진정성이 그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겨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이 겉치레같은 느낌이 없어 좋았다.
오창익 국장은 관점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청와대 앞에서 단식 중인 문정현 신부님을 며칠 전 뵙고 전해들은 이야기라며, 문신부님의 후배이며 청와대에 들어가 있는 어느 신부 이야기를 꺼냈다. 현장의 분위기를 보기 위해 평택으로 내려 온 그 신부를, 문신부님은 기대를 갖고 이리저리 안내하셨단다. 중간에 도랑까지 파고 몇 겹으로 철조망이 둘러쳐진 들판을, 공권력에 짓밟혀 생명을 잃고 내버려진 곡식을, 수십 년 피땀으로 일군 자식같은 땅에서 내몰리게 된 어르신들을.
그러나 아무 말 없이 한 시간 반 여를 둘러보던 그 신부의 반응을 이끌어낸 광경은 땡볕 아래 줄지어 이동하는 전의경 병력이었단다. 그들을 보며 신부는 죄없는 젊은이들이 고생이 많다고 하셨다던가. 오창익 국장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면, 물론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있는 전의경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못지않게,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인네들의 몸부림, 땅의 마음으로 지켜온 농사를 계속하려는 농부들의 열망을 함께 볼 수 없는 신부의 눈은 무얼 의미할까. 청와대에서 파견되면 대통령을 보좌하면, 청와대의 입장이 되고 대통령의 눈을 갖게 되는 신부, 관점 입장 영역. 어렵고도 아쉬운 이야기다.
오창익 국장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인권과 관련해서 다른 데서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 '인권'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연쇄살인범에게도? 강도상해를 범한 사람에게도? 알콜중독으로 불특정다수를 향해 공격성을 보이는 이에게도? 물론 그렇게 질문하면 당연히,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답하게 된다. 당연하지, 똑같은 사람인데. 하지만 연쇄살인범 유**에게도? 얼마 전 용산초등생사건의 주인공에게도? 라는 식으로 질문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하면 멈칫하게 된다. 그렇다고 배웠는데, 마음에서 아니라고도 하는 것 같고. 그래서 난 그가 이어갈 이야기가 자못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유**은 물론, 그 어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도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고 설득할 것인가.
그의 부연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궁극적으로 나의 인권도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권연대 사무실에 하소연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처음 꺼내는 말은 십중팔구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라고 덧붙였다. 수긍은 되지만, 무언가 명쾌하고 강렬한 대답을 원했던 나는 조금 맥이 빠졌다. 내내 곰곰 생각했다. 어쩌면 인권을 대하는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마음가짐이 뭔가 그럴싸하고 가치론적인 근사한 답변만을 원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리 거창한 말을 갖다붙여도 결국, 인권은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보장되어야 할 권리일 뿐, 그 무엇을 위해서도 화려하고 현학적인 말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인데 말이다.
"사이시옷"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다시 묶여져있다. "십시일반"으로 이제 조금 안다 할 수 있게 된 작가들과, 다른 매체에서 만났던 정훈이 장차현실 이애림 최규석은 그래도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여배우 은혜를 두고 스탭들은 수군거린다. "난 사실... 장애인 처음 봐.", "나두... 보긴 했지만... 같이 얘기해본 적은 없어" 단 한 마디의 대사를 꼽아보라면 나는 그들의 수군거림을 떠올릴 것 같다. 정상화 이론이나 장애아 통합 교육론은, 더 이상 소수자를 위한 이상적이고 폼나는 말잔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도와 형식의 보완을 통한 인프라 구축은 물론이고, 경계를 허무는 교감 속에서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그저 차이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이 소통의 본질로 전환되도록... 자연스런 섞임이 가능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실재하는 소수자와 어려서부터 만나고 부대끼고 관계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인권에 대해 배우고 장애인에 대해 동성애자에 대해 배운다해도, 실생활에서 그들과 직접 접하고 만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저 '정답'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소수자 개인이 일반인(?)들의 인권의식 고취를 위한 매개자로만 인식되지 않기 위한, 다름에 대한 배려와 이해 노력은 일종의 전제 조건이다. 존중하며 거리두기보다는 불쑥 다가가 손 내밀고 부대끼는 것, 그리고 나로부터 시작되어 너에게 가닿는... 더불어 살기 위해 입장을 바꿔보려는 시도들이 이제는 정말 필요하지 않을까.
2006-06-19 15:02,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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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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