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01


문학판 돌아가는 것에 어둡고 전처럼 소설을 잘 찾아읽지 않는 나에게 김애란이라는 향수어린 이름은 낯설고도 낯익은 것이었다. 80년생이라는 호들갑과 함께 '달려라, 아비'라는 좀은 쌩뚱맞고 싸가지 없는 제목과 함께 당도한 그녀는 당차고 경쾌한 외양에 똥그란 눈을 하고 있었다. 책날개의 사진은, 잔뜩 우울을 드리우거나 침묵을 머금은 전세대의 소설가들과 사뭇 달랐고 그 중 개성적이었던 김영하와도 자연스러움과 가벼움이라는 점에서 다른 느낌이었다. 한편 소설을 읽으며 그녀가 천착하고 있는 가족이니 자아의 문제는 '애란'이라는 이름이 불러 일으키는 일종의 고전적 정취와 곧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사실 책을 읽은 지는 몇 계절이 지났다. 내가 접한 바로는 거의 일사분란한 찬사 위에 놓인 책이어서 꽤 높은 기대를 품고 있었고, 책장을 덮은 후에는 조금 아리송했던 것 같다. 일단 그녀의 이름 앞에 집요하게도 따라붙는 '80년생'에 대한 감회. 그녀는 이십대 초반부터 중반인 지금까지 소설을 쓰고 발표하고 주목을 받고 있다. 타고난 글쟁이거나 노력가이기는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80년대생의 출현이라는 것이 독특할 뿐 이십대에 소설을 쓴다는 것이 소설가에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대부분 사람들 역시 이십대에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 혹은 깊은 생각을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단의 호들갑스러움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하는 혹은 내놓더라도 독자의 반향을 얻지 못하는 현실의 반증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다시 책장을 펼쳐보니 나는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善意]처럼, 종지감 없는 연극이 끝난 뒤에 터지는 어정쩡한 박수처럼 /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에게 요약되는 방식이 싫다. /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나는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나는 사진처럼 언제나 조금씩 잘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 갑자기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 정당한 노동. 그리고 그 정당하다는 느낌 때문에 갖게 되는 삶의 기준과 편견. 그것은 나에게 어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구절들에 밑줄을 쳐놓았다.
 

그리고 밑줄 그은 구절들을 다시 읽으며 드는 생각은, 그저 나같아서 라는 느낌이다. 물론 기억에 남는 단편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가슴 한 구석에 콱 박히는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각인이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베스트극장' 한 편을 본 뒤에 남는 여운 같은 이미지의 잔상이었다. 세상을 주무르기에 이미 소설은 너무 작아졌고 각자의 시시한 삶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로 작심해버린 소설의 갈 길이 너무 좁아져버린 것일까. 9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이 내놓은 역작(?)은 대부분 이미 시효를 잃은 듯이 조용히 시들어가고, 불과 십여 년만에 대표작 리스트를 완성해버린 듯한 작가들이 소설을 장신구처럼 걸치고 다니고 있기 때문일까.
 

물론 열심히 찾아읽지도 않으면서 이미 가버린 소설의 시대라는 둥 함부로 말하는 것은 참 무례한 일일 것이다. 문학의 정치를 역설하는 누군가의 주장에 공명한 나의 중심없는 편견이 작용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랄까, 너무 일찍 타협해버린 작가들이 우리 시대의 소설을 너무 소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침울하고 신산한 이야기 속 삶의 비의도 발랄하고 재기어린 이야기 속 자아찾기도, 계속되는 동어반복 속에서는 그저 일회용으로 그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김종광의 새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책장에 꽂아둔 손석춘의 소설들에 눈길이 닿았다. 자꾸만 내 속으로만 침잠하려는 내게 손을 뻗어달라고,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달라고.


2006-07-02 05:38, 알라딘



달려라아비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애란 (창비,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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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