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6. 12. 01:37

 
 
조지 오웰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몇 년 전 한동안, 오래 제목만 익숙했던 그의 작품들을 몰아 읽은 때가 있었다. 얼핏 꽤 무겁고 진지해 보였던 책들도 읽다 보면 금세 휘말리듯 빠져들었고, 소설은 소설대로 산문은 산문대로 시대와 호흡하며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자' 애썼다는 뜨거운 작가의 매력을 실감케 했다. 출간된 소설과 르포르타주, 여러 버전으로 편집된 산문모음집 중 몇 권을 읽고 생애에 관한 책도 한두 권 읽은 후 그는 내 마음속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민음사의 '디 에센셜' 시리즈도 굿즈 욕심에 샀는데, 다시 읽어볼 생각은 안 들었고 그냥 소장 중. 

 

작년 말에 국내에 미출간된 [신부의 딸]을 포함한 여섯 권의 조지 오웰 소설전집 세트가 현암사에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복되는 네 권을 이미 다른 판본으로 읽었음에도 반가운 마음으로 구매했는데, 역시나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볼 적극성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아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리고 봄이 시작될 즈음 '오월엔 오웰'을 작정했으나 유월로 미뤄졌다. 책 참 안 읽고 지내는 요즘, 다시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 분명한 현암사의 조지 오웰 소설전집을 정독하며 늘어진 생활을 다소 정비하기로 했고 출간순으로 박스에 나란히 꽂힌 차례를 따라보기로 했다.

 

[버마의 나날]은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5년간 제국경찰로 일했던 버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1934년에 출간된 그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 영국은 1752년 동인도회사를 통해 버마와 교류를 시작했고 1886년에 버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입해 1948년까지 식민지로 삼았다. 소설이 전개되는 시공간인 1920년대 초반의 카욕타다는 철도종착역이 있는 군청 소재지로 법원과 병원, 학교에 공동묘지와 교도소까지 들어선 행정 거점이며 약 4천여 명 인구 중 7명의 유럽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옮긴이 해설에 따르면 조지 오웰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카사라는 지역을 모델로 한 허구의 도시라고 한다.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마 시절]로 읽었는데, 다행히도 대략의 분위기와 극히 일부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면 까마득히 망각한 상태여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고 마지막 25장에 이를 때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인공 플로리의 운명을 따라갈 수 있었다. 플로리는 대영제국의 목재 회사 직원으로 15년째 버마에 살고 있다. 작업 현장인 정글과 위수지인 북버마의 카욕타다를 오가는 그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맡겨진 일을 제외하면 좁디좁은 관계와 의미 없는 수다, 술, 여자, 책 정도다. 뒤표지에 적힌 발문 "공유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은 무의미하다."는 문장처럼, 고독한 플로리의 누군가와 함께하고픈 욕망을 자극하는 엘리자베스와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버마의 원주민들과 지배계급 유럽인들의 각양각색 면모와 크고작은 사건들이 소설의 두 축을 이룬다. 

 

카욕타다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설에서 커다란 갈등과 각종 사고의 배경이 되는 곳은 유럽인 클럽이다. "영혼의 성채"라고까지 표현된 클럽은 식민지에 체류하는 '푸카 사이브'('진정한, 옳은, 적절한, 예의 바른' 영국인이나 유럽인을 부르는 인도의 존칭)인 백인들의 교제와 여가의 장이자, 원주민 고위 관리들도 넘볼 수 없는 "열반의 세계"다. 백인들은 클럽에 모여 고립감과 무기력, 불만과 허위의식을 달래며 원주민들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선민의식을 공유하고 자존감을 높인다. 지역의 극소수 인구집단인 백인들은 절대다수의 주민들에게 경외와 복종의 대상이고, 그들이 불쾌한 날씨와 문화적 지체와 따분한 일상을 견디는 힘은 제국주의의 모순과 부조리를 응축한 클럽 생활에서 나온다. 

 

카욕타다의 백인들이자 클럽 회원인 부판무관 맥그리거, 관구 경찰서장 웨스트필드, 목재 회사 지부장 래커스틴과 그의 아내, 다른 회사의 지부장 엘리스, 산림청 소장 대리 맥스웰의 공통점은 제국주의자로서의 높은 긍지 그리고 수위는 다를지언정 모두가 체화하고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혐오다. 싼값으로 하인들을 마음껏 부리며 위세를 떨 수 있는 환경은 본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식민지 생활의 유일한 덕이지만, 본국의 민주주의와 제도화가 인도와 버마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갈수록 방자해지는 하인들을 이전처럼 마냥 착취할 수 없다는 점은 커다란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어느날 당도한 동양인 한 명을 클럽 회원으로 입회시키라는 포고령은, 원주민들을 스스럼없이 '검둥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물론 지역 사회의 원주민 투 탑인 우 포 카인과 베라스와미에게도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소설의 시작을 여는 인물은 카욕타다의 군 치안판사 우 포 카인, 돈으로 산 관청 서기직으로 시작해 갖은 모략과 악행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는 말년 선행의 공덕으로 현생의 악업을 무화시키겠다는 인생 계획의 소유자다. 등장인물 대다수와 외떨어져 끝없는 야욕 채우기에 골몰하는 그의 현재진행형 타겟은 비교적 청렴함으로 자신과 대비되며 출세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교도소장이자 병원장인 베라스와미. 백인들에 대한 무한 신뢰와 존경을 깊이 내면화하고 자신을 비롯한 원주민을 열등하게 여기는 그는, 동료 백인들이 못마땅해하는 '급진적' 입장의 플로리에게 유일한 대화 상대이기도 하다. 자신을 찾아주는 플로리의 존재에 감읍하며 위기에 몰렸을 때 '백인의 친구'라는 위신과 평판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이 우정은 결국 플로리가 파멸하는 기폭제가 된다. 

 

우 포 카인의 계략이 저변에 흐르는 가운데 별다른 일이 없는 유럽인 클럽과 플로리의 나날에, 래커스틴의 조카 엘리자베스가 등장한다. 몰락의 성장기를 통과하며 영국과 프랑스 출신의 부모를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된 스물 두 살의 엘리자베스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래커스틴 숙부가 있는 버마로 건너왔다. 재능 없이 자유분방했던 예술가 기질의 엄마에게 학을 뗀 엘리자베스는 영민하고 용감한 여성이었지만, 당시 모든 여성이 그랬듯 결혼 외의 사회적 안정을 이룰 길 없는 상태였고 숙부와 숙모는 식민지에서 남편감을 찾을 때까지 그를 돌봐줄 셈이었다. 2년 전 부모로부터 300루피에 산 마 흘라 메이를 정부로 두고 권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던 플로리에게 엘리자베스의 출현은, 버마에서 자초한 타락의 삶을 구원할 일방적 계시가 된다.

 

물소에 놀란 엘리자베스를 구해준 첫 만남의 희망적 조짐을 환기하며 플로리는, 한쪽 얼굴에 선명한 푸른 모반의 수치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에게 다가가고 반감을 사고 눈치를 보고 다시 다가가다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다른 영국인들과 달리 제국주의를 불합리하게 여기고 원주민과 그 문화를 존중하는, 그러나 꿈에 그리던 사냥과 사격을 가능케해준 플로리에게 수시로 극단의 양가감정을 느끼는 엘리자베스의 심경 변화를 플로리는 잘 알아채지 못한다. 숙부의 추행과 마 흘라 메이의 정체, 홀연히 나타나 유럽인 사회를 동요시킨 안하무인 헌병 베럴과의 연결 가능성, 원주민 폭동에서의 플로리의 활약 등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우스꽝스럽고도 진지하게 변화를 거듭한다.

 

엘리자베스와의 사랑과 미래를 통해 비참하게 전락하기 전의 인생을 되찾고 싶은 플로리의 바람은 안쓰럽고 절박하지만, 심경과 언행과 상황의 엇박자는 한편의 소극을 보는 것처럼 실소를 불러일으킨다. 청혼하려던 순간 지진이 나고 연적으로 여겼던 베럴이 냉정하게 떠나고 폭동 진정의 영웅으로 등극한 뒤, 새 생명을 얻은 듯 희망에 부풀어 6주 만에 방문한 신부가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한 플로리는 처음으로 모반에 의기소침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우 포 카인의 사주를 받은 마 흘라 메이의 소동과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 파국이다. 롤러코스터 같은 마지막 순간들, 엘리자베스의 차가운 마음을 용기 내어 확인한 플로리의 선택은 자살. 반려견 플로의 두개골을 쏘고 자신의 가슴을 관통시킨 총알로 지리멸렬한 삶이 멈춘다.

 

베라스와미의 의리로 '사고사' 종결된 그의 죽음 이후 베라스와미는 쇠락하고 우 포 카인은 클럽 회원으로 선출되지만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지 못하고 급사한다. 긴 이야기는 플로리의 사망 이후 맥그리거 부판무관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한 엘리자베스, 숙모 못지 않게 속물적이고 현실적인 식민지 지배계급의 안주인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그의 근황으로 끝을 맺는다. 플로리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짧은 기술 이후 이어지는 "버마에서는 상당히 많은 유럽인들이 자살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사람들이 별로 놀라지 않는다."는 말을 뒷받침하듯 식민지의 시간도 무심히 계속된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마무리다.

 

긍정적이거나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드문 소설이다.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제국주의에 비판적이고 자신의 모순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우리의' 플로리에게 자주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마 흘라 메이와 엘리자베스를 대하는 분열적인 모습은 민망한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 "운명이 어머니의 태내에서 그의 얼굴에 푸른 모반을 찍어 넣었을 때"부터 시작된 다자적 소외와 열등감에 늘 시달리는 플로리의 심경이 자주 묘사되어 영화 [마티아스와 막심]의 막스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막스는 자비에 돌란이 연기했으므로 가당치 않은 상상일 것이다. 주로는 고독과 자학, 아주 가끔 기대와 희망 사이를 숨가쁘게 오가던 플로리에게 모반은 "죽음과 함께 즉시 옅게 변한", "희미한 잿빛 얼룩에 지나지 않았"지만 평생 그의 삶을 지배한 낙인이자 수치의 증표였다. 옮긴이의 해설은 조지 오웰은 떠난 뒤에도 악몽처럼 떠나지 않는 버마 생활의 기억을 떨치기 위해 소설을 써야만 했다고 전하는데, 자전적인 소설은 아니라지만 어느 정도 작가의 페르소나일 플로리에게 그래서 모반이 꼭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출간된 후 버마의 유럽인들에게 적잖은 공분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식민지 유럽인들의 생활상과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 등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크게 과장됐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분량에 꽉 들어찬 당시의 사회문화적 현실은 흥미로웠고 대다수 인물들이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른 내면의 갈등과 심경의 변화가 섬세하게 기술된 플로리를 통해서는 인간 탐구라고 할 만큼의 다채로운 입체성이 느껴졌다. 덕분에 처음 책을 집어들고 조금은 뜬금없다고 여겼던 뒤표지의 발문이 의외의 핵심을 담은 문장이라고도 생각됐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삶의 의미 같은 것에 대해 순한 마음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런 게 문학의 힘이라면 환영.

 

 

조지 오웰•공진호 옮김
특별 양장판 발행 2022.12.5, (주)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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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