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최순덕성령충만기'를 읽을 때도 침대맡에서 책을 집어들었고 제일 앞에 실린 작품에 어쩐지 공명이 일지 않아 한동안 덮어뒀던 것 같다. 그나마 '나쁜소설'에서 언급되는 '윤대녕'에 눈길이 멎어 단숨에 읽어치우기는 했지만, 그가 실험(?)하는 어떤 형식미보다는 함께 윤대녕에 열광하던 우리들의 허름하게 반짝였던 시절이 불과 십 년만에 이렇게나 우울한 현실로 내려앉았다는 실감이 더 신랄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코앞에 닥친 절박한 시험 기회보다 심란한 일탈의 욕망이 더욱 간절한 어느 날, 애꿎게 성실한 태세로 최면씩이나 유도하며 '나쁜소설'을 재현하는 주인공이 자아내는 실소. 그 어이없는 상황에는 가위 눌린 채 발버둥치는, 어쩔 수 없는 생활자들의 처연한 비극이 숨어있는 것만 같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동안 책을 덮어뒀다가 서울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 '나쁜소설'을 읽고 이상한 심드렁함에 젖어 시큰둥하게 일별했던 제목들을 다시 살폈다. 표제작에서도 제목붙이기의 고역에 대해 밝히고 있지만, 그러고보니 짧건 길건 구비구비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몇 마디 말로 제목을 붙이는 일은 실상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싶기도 했다. '누구나 ... 야채볶음흙'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연민이 일기도 하는 경망스럽고 난망하다 싶은 제목이었는데, 막상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모래자갈 섞인 흙을 씹는 것처럼 설겅설겅하던 제목도 금세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빠져들어버렸다. 기발하지만 가볍지는 않게, 조롱하는 듯 하지만 주인공의 입장으로, 그는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부터 참 유연하게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재주를 가진 것 같다.
그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명랑하지만 심드렁한 혹은 발랄하지만 우울한 양가적 감정선 위에서 읽게 된다. 보편의 상식을 단박에 눙치는 허무맹랑한 상상력도, 경험담이라고 믿어의심치 않게 되는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청춘의 회고담도 마냥 슬프거나 마냥 웃기지 않다. 진정성이라는 무거운 말을 갖다붙이기에는 주인공들의 비루한 일상에 한 번 더 낙인을 찍는 것 같아 미안하고 개연성이라는 무책임한 말로 설명하기에는 그들 존재에 사무친 상처가 너무 깊은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이야기의 목적은 해결에 있지 않고, 그는 많은 작품에서 슬며시 사라지거나 상황 자체를 페이드아웃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비껴가는 맺음이라기보다, 결국 인생도 이야기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호흡을 고른 후부터는 되바라지지 않은 세련과 허랑방탕하지 않은 상상으로 잘 버무려진, 첫 작품집보다 한결 균형이 느껴지는 그의 이야기들 모두를 참 재미나게 읽었다. 현실에서 만난다면 별로 반가울 일 없을 것 같은 시덥잖은 특기의 소유자들이 줄줄이 등장해 푸념처럼 내뱉는 밥과 노동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향한 넋두리. 정상과 비정상 혹은 일상과 망상의 경계를 지우는 고독한 인간의 박진감 가득한 고백. 마침내 '이야기'의 치유력을 믿고 '쓰기'를 소명으로 삼은 저자의 갈팡질팡 내력까지, 자기만의 세계에 내려앉아 수세적으로나마 '동지'를 찾아 외연을 넓히려는 자들의 밤너구리같은 모색이 즐비하다. 현실은 이렇게 냉정한 것이라고 정색을 하는 게 되려 민망할 정도로, 복합적인 결핍과 함량 미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심과 진력이 눈물 날 정도로 상쾌했다. 게다가 책 말미에 한 편의 시시껄렁한 시처럼 남겨진 작가의 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미안합니다.
이번엔 작정하고 '내' 이야기들을 좀 써보았습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습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 말이,
당신에게는 미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인류평화를 위해 장가를 갑니다.
인류평화를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해 준 여자친구에게,
전(全) 인류를 대신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평화로워진 지구에서, 또 만납시다.
2006년 7월 처녀좌에서
이기호
2007-01-17 23:15, 알라딘
갈팡질팡하다가내이럴줄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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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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