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8. 22:38


'세상엔 두 부류의 OO이 있다. OO한 OO과 OO한 OO', 류의 우스개 소리를 잊을 만하면 듣는다. 사진과 관련해서 사진 찍히기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정도로 부류를 나눈다면, 나는 사진 찍히기 '겁나게' 싫어하는 사람의 상위 몇 %쯤에 거뜬히 들어갈 것이다. 지금처럼 멀미가 날 정도로 사진을 찍고 올리고 돌리는 지경은 아니었지만(내 조카가 생기니 이해가 되기는 한다),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도 나날이 성장하는 자식의 어린 시절을 참 열심히 찍어두셨다. 커가면서는 잔뜩 멋적어하거나 노골적으로 찡그린 얼굴이 많지만,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을 적의 나는 자주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기도 하다. 
 

사진 찍는 건 꽤 좋아하는 편이라 디카가 흔해지기 전, 폴라로이드와 로모, 후지 미니인스탁트까지 구비해 이따금 떠나는 여행에서 꽤 많은 사진을 찍어 간직하고는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처분이 곤란할 정도로 수북한 사진을 보며 혼자 흐뭇해하다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한두 장씩 끼워넣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였다. 사진 찍히기를 워낙 싫어하다보니 물론 언제나 나는 없다. 압권은 5주간의 배낭여행이었는데, 스무 통은 되는 사진들 속에 오로지 길과 풍경만이(그것도 꽤나 쓸쓸하고 우울한) 빼곡히 담겨있는 사진을 본 아빠는 정말 침통한 표정으로 '대체 너는 왜 그러냐?'고 씁쓸히 한 마디를 날렸다. 스핑크스도 루브르도 심지어 있느니 모래뿐인 사막에서도 투철하리만큼 집요하게 독사진을 박아내고야마는 아빠의 피를 물려받은 것 치고는, 내가 생각해도 꽤 반유전적 성향이기는 하다.

이 책, 너무나 '샘터스러운' 대책없이 고답적인 제목과 구성이지만 잔잔히 읽는 재미가 제법이다. '그리운 유년, 그리고 학창시절', '성장의 고통, 그리고 나의 가족', '내 곁에 왔던 사람과 풍경들'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나뉜 이야기들 속에 스물 아홉명 필자들의 '한 순간'과 긴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윤대녕과 조은 정도가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 별 기대없이 시작한 읽기여서인지 오히려 나머지 작가들의 사진과 사연 중에 마음에 와닿는 것들이 많았다. 대체로 빛 바랜, 사진이라하면 김치건 치즈건 하다못해 하나둘셋이건 약속된 구호 아래 초점을 맞추고 긴장의 순간을 잡아내던 시절의 애틋함이 담겨있다. 일종의 기념 혹은 유산으로 남겨진 오래 전 사진에 덧붙인 글에는, 어쩌면 청탁을 받고 오랜만에 꺼내본 사진 위로 울컥 덮쳐오는 새삼스런 감회에 젖었을 필자의 물기어린 그리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읽히는' 가난의 마지막 증언자가 아닐까 싶은 공선옥이 고향 들판에서 동생과 함께 찍은 일곱 살 적의 사진과 어린 날 이야기, 교복 모자를 벗어 손에 쥐고  친구의 어깨에 호기롭게 팔을 두른 열여덟의 윤대녕과 '삼류극장과 독일빵집의 시절' 이야기, 사제인 아버지가 지키던 관촌 대소원 성당을 배경으로 한 단체사진과 교회 사택에서 보낸 말썽꾸러기 소년 이만교의 고향마을 이야기, 젊은 시절의 청신함이 싱그러운 박범신의 강경집 수돗가 사진과 애처럽고 쓸쓸한 가족 이야기, 1930년대 초의 부모님 신혼시절 사진과 함께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최인호의 이야기, 생사의 기로에 선 스승 구상 선생을 향한 통절한 안타까움이 배인 이승하의 이야기... 그야말로 '내 마음속 사진첩에서 꺼낸' 사진을 보며 방울방울 솟아나는 추억을 쏟아낸 글들이 마음을 싸하게 한다.    
 

누구나 '나'와 관련한 어떤 '하나'를 선택하고 이야기하게 되면, 좀은 촌스러울만큼 구구하고 절절해지는 게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시덥잖거나 성의 없게 느껴지는 몇 개의 꼭지를 빼면, 미처 관심하지 않았던 게 괜히 아쉬울 만큼 내밀한 고백들이 새삼 정답고 따스하다. 책장을 덮고나니 자연스레 나의 '이 한 장의 사진'에까지 생각이 이른다. 스무 살 이후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은 꽤나 희귀한데, 그 중 딱 떠오르는 사진은 2002년 9월 어느 날의 사진이다. 지난 번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함께 잃어버린, 언젠가 쓸 일이 있어 스캔해 놓은 드물게 스스로 마음에 들어하는 흑백사진. 리뷰를 올리며 같이 올려볼까 잠깐 미친 생각을 했다가 다행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읽은, 사람 냄새 담뿍 배인 편안한 책이다.


2006-12-31 02:57, 알라딘



이한장의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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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완서 외 (샘터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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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