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여구 없이도 스스로 수사의 기능을 겸비하는 듯한 느낌의 단어들이 있다. 이거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갈등했지만 결국 펼쳐보고만 이 책의 제목 역시 오해와 이해 사이를 아슬하게 가로지르는 단어들의 조합. 그러나 프라하와 소녀와 시대는 매우 정확하게 공간과 당사자와 시간을 가리키는 이를테면 일물일어에 충실한 작명이었다. 십대 시절 1960년대 초반의 몇 년을 프라하의 소비에트 국제학교에서 보낸 일본인 요네하라 마리의 회고담, 이념과 감수성과 개인과 국가가 비등한 비율로 어지러이 혼재된 세계의 추억담이다.
1960년대 초반, 각국 공산당의 이론정보지인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의 일본 공산당 대표인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에 머물렀던 저자는 50여개국의 학생들이 모인 소비에트 국제학교에서 4년간 교육을 받는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리스 창공의 아름다움을 눈에 선한 듯 찬미하던 리차, 언제나 과장된 꾸밈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던 루마니아 출신의 열혈 애국소녀 아냐 그리고 마음 한 켠에 드리운 짙은 고독을 도도하고 의연한 어른스러움으로 에두른 촉망 받는 재능의 소유자인 유고슬라비아 소녀 야스나. 마리와 각별한 우정을 나눈 세 소녀의 지난 이야기와 이후 재회의 사연이 각기 독립된 장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마리가 프라하에 체류하던 시절은, 아직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비교적 공고한 체제로 기능하고 있던 때. 특히나 소비에트 학교의 학생들은 대개 수십 년간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각국 공산당 혹은 공산주의 정권의 요인으로 자리 잡은 부모를 두고 있었으며, 학교의 분위기 또한 인간의 얼굴을 잃기 전 순진한 공산주의의 표정을 담은 곳이었다. 가장 예민한 성장기를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는 소비에트 학교에서 보낸 마리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경쟁과 무관심으로 점철된 학교 생활에 시달리며 프라하 시대의 향수를 그리움과 동경으로 회상한다.
역사와 현재가 판이하게 다른 수많은 나라에서 왔지만 각자의 고국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자연스러웠던 우애로운 평등, 누군가에게 컴플렉스가 되는 부분은 절대로 놀림감 삼지 않는 아이들의 인간적인 성숙과 배려, 특출난 재능의 발견이 질시나 경쟁의 재료가 아닌 공공의 미덕으로 승화되는 협동적 기풍 같은 것들. 이를테면 활자 그대로의 '共産'이라는 정신이 아직은 살아있었거나, 혹은 부모가 선택한 대의를 대물림하여 내면화한 물들기 전의 아름다운 지향을 아이들과 학교는 지켜가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그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 우산 아래의 특권속에 안주한 소녀 시절이었기에 향수는 다분히 인간적이고 갈등과 고뇌가 있을지언정 안온하며 평화롭다.
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일본에서 생활한 저자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한 1960년대 후반 불안정한 동구권의 정세와 90년대에 불어닥친 유고 내전의 바람 속에서 소녀 시절 벗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위를 궁금해한다. 십대의 몇 해를 함께 보낸 친구들과의 추억은 내밀하고도 사적인 것이지만, 조국과 인종과 모국어를 달리하는 그녀들의 인연은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격동이 빚어낸 것이었기에 이후의 행보 또한 역사의 궤도와 떼어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입을 앞두고 하나둘씩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들을, 저자는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찾아나선다.
90년대 중반 자본주의의 물결이 어지러이 일렁이는 프라하는, 삼십 년 전 소녀들의 반짝이는 재잘거림을 추억하기에 너무 많이 변모해버렸다. 그러나 어렵사리 수소문한 친구들과의 재회. 공부와는 담을 쌓고 영화배우를 꿈꾸었던 매력 만점의 리차는 어린 시절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실하고 믿음직한 민중의 의사로, 과장된 거짓말과 과도한 애국심으로 늘 현실의 모순을 비껴가던 아냐는 부패한 공산정권의 주구가 되어버린 부모의 특권과 뒷받침으로 영국인과 결혼하여 서방의 기자로, 마리의 가슴속에 짠한 그리움과 비밀스러운 연대의 우정을 남겨준 야스나는 유고 내전의 피폐한 현실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고단하나마 묵묵히 살고 있었다.
올해 봄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 마리의 삶은 책날개의 소개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만, 프라하 시절과 옛 친구들을 회상하는 행간을 읽으며 그녀가 어떤 가치를 지향했는가 하는 것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실명을 거론하며 후일담 형식을 취하는 이 글에서 그녀는 가급적 친구들을 '판단'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린 시절 호흡했던 프라하의 공기와는 사뭇 다르게 고도화한 자본주의의 만성적 병폐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일본에서 생활하며, 그녀는 자신의 체험으로 녹여낸 성찰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체제 그리고 인간의 문제를 담담히 보여준다. 매우 주관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경계 위에 선 자의 긴장을 잃지 않음으로써 개인과 세계, 역사를 넘나들며 더욱 생동감을 얻는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녀들의 소녀 시대 역시 이미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공산 체제의 특권층에게만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 시대 민중의 삶과는 분명한 괴리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유년기의 경험에까지 혐의를 들씌우는 것 역시 무척이나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저자 마리를 비롯해 리차와 야스나 그리고 주변인물로 언급되는 몇몇의 진실한 삶의 행로를 보며 스미는 연민과 감동이 만만치 않다. 역사도 이데올로기도 체제도 결국 사람 하나하나의 문제일지 모르겠다. 소박하고 사소한 삶과 관계들이 모여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는 변할 수 없는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2006-12-31 21:31, 알라딘
프라하의소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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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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