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39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즐겁고 있다. 편하지 않았던 사무실 동료를 대면하는 마음의 턱이 조금씩 사라지고, 예전 같으면 부담에 부담을 느끼며 잔뜩 몸을 움츠렸을 상황조차 이상하게 편안하다. 고작 두 권의 독서로 일상의 기분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날들, 이 나이에 인생의 책 운운하며 새삼 깨달음을 얻은 듯 떠드는 게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은 새벽, 침대맡에서 잔뜩 고무되어 호흡을 고르다가 집어든 책이 한참을 묵혀두었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였다. 현재적으로 살아 생동하는 이들에게 '현혹'되는 일은 이제 그만, 이라고 외쳤던 내속의 소리도 가볍게 묵살. 모두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전염이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제목의 첫 단어는, 원시사회의 '권력 없는 추장'으로부터 빌어왔다고 한다. 누가 누구를 '대표'한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수유+너머' 공동체의 고민이 만들어낸 호칭, 저자는 회원들이 자신을 부르며 슬며시 머금는 미소와 그 웃음을 바라보는 자신 역시 짓게 되는 웃음에 대한 이야기로 '고추장'의 내력을 설명한다. 권력에의 의지가능성만으로도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존재였다는 원시사회의 추장 이야기는 오늘날 곳곳에 만연(!)한 대표의 폐해를 이따금 불가항력인 듯 무력하게 목도해왔던 입장에서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저자는 어쩌면 깊이 고민하기도 전에 지리멸렬해져버린 키워드에 새롭게 접근한다. 자유, 행복, 도덕, 기억...들로부터 마침내 인권과 국가, 그리고 혁명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구성하며 한편 하나의 축으로 작용하는, 이미 생활과 떼어내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조차 단념해버린 듯한 단어들. 혹은 넘치는 말들 속에서 진작에 빛을 잃고 새로운 수사들만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개념어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떠올리기도 전에 파묻어버렸던 물음을 되살리는 일이고 묻기도 전에 대답해버렸던 질문을 기억해내는 일이다. 니체의 입을 빌리고 스피노자와 클라스트르를 인용하며 맑스와 엥겔스를 불러내는 그의 이야기에, 현학적이거나 난해한 부분은 거의 없다. 그저 그렇다고 주워섬겨왔던 지식의 관행에 새로운 의문부호를 달고 허황하지 않은 희망을 길어올리려는 그가 말하는 많은 것들이 내게는 반갑고 소중했다. 
 

나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십여 개에 달하는 말들의 향연에 빠져 조금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 그는 '세상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가 '論'하는 세상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자는 2000년대 소수자의 형상을 한 몸에 담고 죽어간 故 최옥란이다. 그리고 5cm도 안 되는 문턱에서도 좌절하는 사람들, 언론이 흘려대는 공허한 평균치를 체감할 수 없는 양극화 속의 가난한 사람들, '의식은 또렷한데 숨쉴 수 없'어 죽어가는 농민들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속에 있다. '대표'를 자임하는 권력과  눈 감고 기도하는 대중, 새로운 정체성을 생산하지 못하는 정치, 평화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미국 그리고 상상의 공포로 세계를 유린하며 무한증식을 획책하는 무시무시한 생명권력이 있다.
 

누군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버젓이 세상 한 구석에 존재하지만 내가 모르던 일들 중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처가 될 만한 사실들이 많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 피어오르는 질문이 있다. 계속해서 상처를 받다보면 결국엔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자꾸만 스스로가 작아지고 미워지다보면, 나처럼 심지가 약한 인간은 아마도 결국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향하는 시선에 마음을 맡겨버리고 말 것이다. 내 속을 들여다 볼 용기 없음과 내 몸을 바꾸고 싶지 않은 지독한 관성이, 타인의 고통에만 천착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기형의 자아를 더욱 공고히 만들어온 것은 아닐까.
 

지난해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어두운 것도 집착이더군요."라는 말이 있었다. 편지를 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글을 읽는 내 마음 속에도 깊이 공명이 일었다. 편지함에 넣어둔 지도 한참이 지난 서신의 한 대목이 다시 떠오른 것은 열흘쯤 전이었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는 중이었고, 정확히는 '자의식, 또 하나의 문턱'이라는 장을 읽으면서였다. 우울과 어두움과 불안들, 갖은 어찌할 수 없음에 사로잡힌 불균형한 자의식이 내 목을 죄고 또한 내가 거기에 목을 매고 있었다는 것을, 그 전에라고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음울한 집착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면서, 나는 늘 저 멀리 있는 누군가의 상처를 힐끗거리며 세계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저자는 '돈 없이 살 궁리'라는 에필로그로 책을 마무리한다. 자신을 무슨 대단한 운동이라도 하는 듯 여기는 친구의 이야기를 꺼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역시 자신의 살 궁리임을 이야기한다. 지식인 또한 위기의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점을 나는 가끔 잊는다. 생활은 없고 사유만 있는 듯한 저 먼 곳의 지식인이 아닌, 제 살 궁리로써 세계를 사유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그의 글에서 어떤 절실함과 고양감이 느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 쉽게 끄덕이고 너무 쉽게 아파했던 까닭은, 어쩌면 그 끄덕임과 아픔 속에 정작 나 자신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자주 무겁고 활짝 웃을 수 없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일런지 모른다. 세계를 바꾸려는 지난한(?) 욕망은 결국 내 속의 질문으로부터, 힘겨움에 중단하지 않으려면 웃으며 함께 가야한다는 것. 이제 나도 '살 궁리'를 시작하였다.


2007-05-02 01:36, 알라딘



고추장책으로세상을말하다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학일반 > 사회비평에세이
지은이 고병권 (그린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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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