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수유+너머'를 처음 알게 된 건 "book+ing 책과 만나다"를 손에 넣으면서였다. 제목과 지은이 집단이 유인하는 호기심에 책의 목차를 훑어보고도 언감생심 욕심을 부려 본 터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삐딱하게 있어 보이는 건 꽤나 좋아하는 탓에 사두기는 했지만, 다시 확인한 목차에서도 변치않는 좌절을 동반하는 거리감과 그들이 구사하는 그 낯선 언어에 지레 질려 책장을 덮고 잊어버렸었다.
이진경의 '철굴'은 소시적 철없는(?) 선배들로부터 아주 몹쓸 책으로 일찌감치 찍혔던 터라 청개구리 심보로 들춰본 게 십여 년 전, 그 이진경이 이 이진경이라는 컴백한 연예인 소식 전해들은 심드렁한 반가움 정도로 그들에 대한 호기심은 정리되었다. 그러나 몸에 배인 버릇은 무서워서 '수유+너머' 딱지를 달고 나온 몇 권의 책들은 언제 샀는지도 모르게 책장을 채워가고 있었고, 우연히 관심하게 된 블로그 주인장의 일상을 이따금 엿보며 종이책으로 활자화되지 않은 '수유+너머' 공동체를 간헐적이나마 지켜보곤 했었다.
이후 그들이 '소수자 선언'과 함께 발표한 일련의 글들을 접했고, 이전 그들이 집단적으로(?) 구사하는 단어들의 생소한 용법에 의아해했던 기억이 무색하게도... 무려 이해가 되며 마구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그들은 거리의 싸움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혹은 그들이 벌이는 거리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목도하기 시작했고), 'F키라' 까페를 개설하고서 생기발랄하고도 즐겁게 한미FTA를 공략하는 투쟁을 즐겁게 지켜보며 한편 내가 섰던 거리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나부끼는 '수유+너머'의 깃발이 일방적으로 정겨워지기 시작했다. 좀은 시끄럽게 동 뜨기는 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렴 어떠랴.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산파 역할을 한 고미숙씨가 탄생부터 2003년까지 공동체 내부를 들여다보며 써내려간 글이다. 국문학 고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교수사회의 진입장벽과 제도의 불모성에 잠시 좌절하고 일찌감치 자유롭게 공부하는 즐거움을 꿈꾸며 수유리 한 구석에 작은 공부방을 열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수유+너머'는 남산 아래 옛 정일학원 건물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다.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로 차마 욕심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다닌 여고가 있는 그 거리가 훤히 떠올라 괜히 그리워졌다. 요즘은 그렇게 잘 안 부르는 듯 한데, 내가 여고를 다닐 때만 해도 그 동네의 이름은 다름아닌 '해방-촌'이었다.
사람들은 때로 자기가 꿈꾸던 무언가를 실천으로 옮기는 이들을 보며 묘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쌩짜로 말하자면, 팔짱 끼고 앉아 여기저기 뜯어보며 곱씹어보며 어디 이것들이 잘 하나 보자 하는 마음 같은 것? 물론 그들이 그들의 무기인 말로 좀 오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다. 꼴랑(!) 2주일 도보순례에 '대장정'을 떡하니 갖다붙이고는 지식인의 신체성이 어쩌고 저쩌고, (차마 원텍스트에 접근할 능력도 없으니 그저 감정적 거부감을 감추기가 더 급하기는 하지만) 한 문장 건너 하나씩 튀어나오는 그 잘난 유목이니 횡단이니 배치니 기계니 되기니 하는 단어들의 생소한 용법들.
하지만 어쩌면 얄미울 정도로 세련되고 근사하게 자신들의 사유와 활동에 어울리는 수사(?)를 붙이는 것 역시 능력이고, 어쩌면 알 듯 모를 듯한 그 말들의 자장이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 역시 능력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감히 내가 주워삼키기도 뭣하지만 나는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그 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성에 아직은 불가결한 새로운 개념어가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오히려 그렇게 반복 구사를 해주니 언어권력을 움켜쥐기보다는 퍼뜨리고 또 퍼뜨려 함께 쓰고 함께 가자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노력 아닐까 싶어지기도. 용어의 보편화를 견인하며 그들이 전파(?)하는 개념어들이 '정의(definition)'의 권력으로 화하지 않기를, 감히.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사로잡힌 말들을 움켜쥐고 말하고 또 말한다. 지적 탐색 끝에 도달한 의심의 여지없는 일물일어인지, 개념을 풍부화할 부수어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동어반복인지, 이도저도 아닌 그저 습관성 남발인지 내 알 바 아니지만, 어쨌건 낄낄대며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말들이 친숙하고 그럴싸하게 들려버리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잠시 너그럽자면, 나는 책에서 느껴지는 자족적인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마침 자신의 구체적 생활이 지향을 향해 변화하는 과정이라면 더욱 당연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수유+너머'의 미래상에 대해 단언하지 않는다.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 이라고 경쾌하게 말하는 그들이 나는 그래서 더 미덥다. 그들의 꿈은, 돋보이기 위해 타자와 비교하거나 기존의 것들을 폄훼하고 무시하지 않는다. 이미 어떤 식으로건 해방을 향해 가고 있는 다른 인물, 다른 집단으로부터 배우고 참조하는 것에도 적극적이다. 운동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이 아니라 경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참 보기 좋게 보여준다.
잘난 좌파 엘리트 공동체를 만든 우두머리의 일기장이라고 설핏 보아넘기기에는, 그들이 나날이 적나라하게 부딪히며 건설하고 지속하며 애쓰는 모습도 참 예쁘다.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꿈의 공동체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 자기를 바꾸지 않으면, 자의식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국 함께 꾸는 꿈 역시 몽상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것.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고 갈등하고 때로는 대립하고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현재를 이룬다는 것. '수유+너머'가 흐뭇한 것은,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고마운 것은, 우리 이만큼 했다가 아니라 당신도 하세요! 라고 책이 자꾸만 말한다는 것이다.
책장을 덮으며 더욱 '기특'했던 것은 개인적인 독후의 감이었는데, 나도 '수유+너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 참 아름답고 보기 좋지만, 그 중심에 나도 끼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서 나도 저렇게 웃으며 가고 싶다는 생각. 남산 해방촌 자락 모교가 있는 그 먼 곳을 그리워하기보다 곳곳에 이런 앎과 삶의 공동체가 생겨나기를, 그리하여 곳곳의 공동체 그 어딘가에 나도 있기를. '그들의 언어'를 어줍잖게 한 번 빌리자면... 내가 있는 자리를 초원으로 만드는 유목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 지리멸렬한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덤덤하게 허우적대던 내게 활기를 불어넣어준 책, 뒤늦게 고맙다.
2007-04-27 02:00, 알라딘
아무도기획하지않은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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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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