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편의 단편이 묶여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는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에서 그녀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알게 되었다. 소설속에서 메구무는 유령처럼 스쳐간 실제 인물로 그리고 하나의 오브제로 등장했었다. 열여덟에 첫 소설을 발표하고 일본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던 그녀, 반의 반쯤 한국인의 피가 섞여있음을 뒤늦게 알고 반년 정도는 한국에 머물기도 했다고 하며 몇해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건 95년, 서문을 장식한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 그녀는 새파랗게 젊은 작가의 문학을 향한 열정과 청춘의 생기를 진하게 발산하고 있지만 이제는 세상에 없다.
'강변길'의 소년은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향한 배다른 누이의 복수로, 매달 생활비를 받으러 새 여자와 살고 있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간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에게는 버림 받았지만, 그 고역의 강변길은 오히려 사무친 상처와 구질구질한 일상의 유일한 돌파구처럼 보인다. 애증도 핏줄당김도 없이, 안절부절 대문 앞에 서거나 이따금 어색하게 아버지와 마주앉는 소년은 담담하다. 누이와의 다툼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음이라기보다 무심히 난감을 즐기는 듯한 소년은,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을 온몸으로 앓을 뿐 더 이상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갈매기집 이야기'에는 조금 복잡하게 엮인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행간에 흐르는 나른함 때문인지, 때로 소리치고 좌절하는 인물의 표정조차 종이인형의 그것처럼 건조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진다. 원정이라는 걸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2군에서도 짤려버린 야구선수 옛 친구를 위해, 주인공은 하네다 공항의 창가 까페에 기꺼이 동행하지만 그 살가운 위로도 어쩐지 허약하고 힘이 없다. 두꺼운 이불 아래 상처를 깔아뭉갠 듯, 낯익음이나 낯설음도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 인물들은 서로를 부여잡지 않는다. '잊혀진 가사의 한 구절'같은 여인만이 선명한 표정으로 존재감을 발하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알 듯 모를 듯 묘연함 위에 존재할 뿐이다.
'썩어 가는 동네'는 좀더 명료하고 좀더 아련한 느낌이다. 주인공 사내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른 나이에 자의로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덧없음을 깨달아버렸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몸과 살아있는 자기자신 뿐. 그토록 아끼던 많은 것들이 거짓말처럼 불길속에 사라지는 모습은, 이후 그를 간소벽과 이동벽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여기서도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관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세 번, 도쿄 지하를 가로질러 그가 찾아가는 방과 후 학원의 마을에서 풍기는 이물감을 담은 역한 냄새만은 명징하다. 마을 사람 누구도 쉽사리 감지하지 못하는 '썩어가는' 냄새,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을 환영처럼 여기는 그에게만 강박처럼 달려드는 냄새. 사실 누구나 이미 젖어든 것으로부터는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표제작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썩어 가는 동네'를 서성이거나 돌아선 인물들 같다. 냄새 대신에 주인공이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은 급격한 영락과 맞바꾼 가면의 삶을 살아가는 누이와 어머니의 존재, 조금 다른 점은 그 역시 무대를 오가며 이따금 연기를 하면서도 내밀한 상처에 늘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동안 뭉갠 상처는 얄팍해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희미한 불안과 함께 등장한 그녀를 경계하고 관심하면서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을 내내 떠올리지만 결코 입밖에 내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도착한 어긋남을 확인하고 오래 덮어두었던 무거운 짐을 생각하지만, 누구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자명할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하나같이 먼 곳을 응시하듯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뚜렷한 상처를 깔고 투명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방비의 삶을 덮쳐오는 시련에도 인물들은 담담하고 단단하게 일상을 이어간다. 애당초 희망 따위는 없었다는 듯 쉽게 체념하고 자연스레 절망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살아간다. 무심한 듯,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에는 기약없이 순환하지만 강고한 우연의 연쇄가 내재되어 있다. 고작 이십 몇 년을 살아온 그녀의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풍경들이 들어차있었던 것일까 궁금해진다. 남루하고 보잘 것 없지만 발버둥 대신 묵묵히 살아가기를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 살아있는 그녀가 내보인 이야기들은 여기까지다.
2007-01-03 01:57, 알라딘
돌아가지못하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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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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