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분석할 수 있지만 아니 에르노야 말로 그 극단에 이르는 글쓰기를 하는 것 같다. 시골 잡화점집 고명딸로 태어나 애지중지 성장하며 공부 능력과 문화적 취향으로 주변의 이웃 혹은 어른들과 차별화되며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되었지만 출신 계급에 대한 컴플렉스와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며 내면화한 고루한 가톨릭 신앙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양가감정이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이행하는 열여덟 시기 그녀의 원형질이었던 것 같다. 집과 기숙사를 벗어나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 여름 캠프에서, 이러한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성적 호기심과 욕망까지 더해져 일어난 사건과 관련한 후일담이 서늘하게 담겼다.
자신의 감정과 삶을 활자화해야만 하는 집요한 강박이 작가에게는 구원이자 형벌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니셜로 등장하지만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반복적으로 인터넷 전화번호부에 검색되고 마침내 구글에서 당사자는 전혀 모르는 채 금혼식 가족사진으로 현재의 정체가 드러나지는 H가 오히려 가여울 지경이었다.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131p)에서는 약간 망연자실했는데, 내가 이상한 걸까. 저자는 비상한 감각적 예민함과 타고난 작가적 기억력과 기록 강박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한 수많은 사건과 그를 구성한 인물들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해체하고 소환하며 자신의 삶의 과거와 현재에의 의미와 영향을 자문하는데, 솔직히 읽으며 질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에르노•백수린 옮김
2022.11.30초판1쇄발행, 레모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마의 나날] (0) | 2023.06.12 |
---|---|
[보통 일베들의 시대] (0) | 2023.05.14 |
[사건] (0) | 2023.05.08 |
[에이징 솔로] (0) | 2023.04.22 |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0) | 2023.02.21 |